내가 행복해야 주변이 행복하다

정용화




세상은 수 많은 사람들로 살아가지만 그것을 이르는 정점에는 단 한사람뿐이다.

즉, “나”란 존재다.

“나”란 존재가 있으므로 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나”란 존재가 세상 속에 속해 있지 못하면 그것은 이미 나의 세상이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다소 독선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지만, 세상이 자신의 의지에 놓여 있어야 주어진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음은 틀림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석가의 탄생 비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천상천하는 바로 세상이며, 유아독존은 내안의 존재의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세상 모든 것의 존재는 내 안에서 비롯되며,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도 내가 의식하지 않으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천상천하 유아독존은“나”란 자아에 대한 인식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태어나고 자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자유롭지 못하듯이

세상에 살면서도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하고 항상 세상에 끌려서 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번민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다른 사람과의 유기적인 동화를 이루지 못해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나”란 존재는 세상의 구성요소 일뿐만 아니라 스스로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다.

때문에 스스로 노력에 의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변화를 주도하여 새로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러한 생각들이 새로운 사상으로 세상 속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바로“나”란 가족에서나 친구에게서나 또는 세상 속에서나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다.

물론 세상은 또 다른“나”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가치를 공존하고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조직이지만,

“나”란 존재를 존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그 사회는 건강해지고 새로운 발전의 동력으로

미래를 이끄는 주도적인 집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로의 가치들을 조화하고 융화시키는 것이 바로 동화다.

동화는 바로 개인의 생각과 목표들이 사회라는 울안으로 녹아드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하지 않고 더 좋은 공동의 목표로 발전하는 것이다.

개인의 생각을 스스로 의지로 구현하지 않아도 사회라는 울에서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추진력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나누고 보완하면서 개인의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나”란 존재에 대한 자아인식의 선행이 우선이다.

이것은 독불장군이나 아집만을 고집하는 유아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자각 없이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의지를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의 생각을 행동화하면서 그 일에 대한 가치를 모른다면,

그것은 “산다.”라는 말보다 그저 살아가는 것이기에 동물과 달리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 아름답다. 란 말처럼 스스로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나”란 인식을 자각하고 산다면, 항상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음악이 있는 날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축복 같은 것이다.

낯선 것들도 자주 접하다 보면 제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듯이 음악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학창시절에 가장 성적이 나오지 않는 과목이 음악이다.

오선지나 음표, 그리고 각종의 음자리표나 쉼표 등은 낯설기도 했지만, 필수가 아닌 선택이었기에 등한시한 측면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내게 있어서는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악기를 산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 할 환경도 한 몫 했었고,

모차르트나 베토벤 등의 명곡이나 클래식, 팝송을 듣는다 해도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경험이 산지식이듯이 직접 또는 간접이라도 접해본 경험이 있어야 취미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유년시절을 산촌에서 가난을 벗 삼아 보낸 나로서는 음악이란 부잣집 아이들이 취미삼아 하는 오락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도 음치에 가깝다.

음표를 보고도 얼마나 음을 길게 가져가야 할지 가름이 안 되고, 음 높이를 몰라 한마디로 소음불가에다 박자를 놓치기 일쑤다.

노래방에도 갈라치면 아는 사람과 가면 그런대로 아는 노래 한 두곡은 어찌어찌 부르고는 하지만,

회식과 같은 모임에서는 분위기 망치는 발라드에다 노랫말도 떠오르지 않아 떨려서 버벅대다가 마이크를 빼앗기기 십상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은 사람들 감성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사랑할 때의 행복하고 기쁨에 찬 마음과 슬플 때의 가슴을 적시는 절절한 사연들이 오선지에 녹아든 감정이라는 또 다른 형식의 표현이다.

기쁨은 기쁨 그대로 슬픔은 슬픔 그대로 승화시킨 아름다움과 결합된 감정의 징검다리다.

살면서 한 번쯤이라도 진정한 기쁨이나 슬픔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음악이 주는 감동과 음악과의 마음의 동화를 경험해봤을 것이다.

비 오는 날의 빗소리와 같은 때는 소나기가 되기도 이슬비가 되는 촉촉한 느낌과, 창문 너머로 햇살이 가득 내 품에 안기듯 충만한 기쁨과,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와도 같은 느낌의 음악은, 바로 내 몸에 딱 맞는 한 잔의 커피 맛과도 같다 할 수 있다.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눈과 귀를 세상을 향해 열어놓으면,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서로의 가슴의 벽을 허무는 따뜻한 감동을 주는 음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마음의 울타리 너머로 소리 없이 다가오는 포근한 노래들로 나의 뜨락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친구들과 모여 불러보는 어린시절의 동요나, 학창시절의 포크송 키타 선율이 매력적이던 통키타 음악 및 조관우 노래는 시간을 뛰어넘어 빛바래지 않고 아름답듯이 오늘 잠시 라디오나 TV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음악은 나의 가슴속에서 아름다운 느낌으로 기억될 것이다.

잠 못 드는 밤, 별을 세고 울을 넘는 양떼를 헤아리듯이 음악은, 아름다운 자장가로 내 영혼을 포근하게 잠들게 할 것이다.





행복이라는 색깔



나를 색에 비교한다면 검은 색에 가깝다.

때에 찌들다 못해 더 이상 검어질 수 없다.

그렇기에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얀색으로 더욱더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들이 많았기에 나의 생은 검은 옷을 입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은 검은 빛깔의 색이 아니다.

누구보다 더 하얀 빛깔의 옷을 입기를 갈망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대부분 행복이나 기쁨 혹은 이익에 대해서는 스스로 인색하다.

남보다 자신은 <무엇인가 부족하고 손해보고 있다.> 란 인식이 강하기에 행복을 느끼는 감정도 적을 수밖에 없다.

나 역시 그렇다.

몸도 남보다 왜소하고, 교통사고로 다소 장애를 갖고 있으며, 소유한 재산도, 지식과 지혜도 남보다 부족함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에 기쁨보다는 슬픔을 떠안고 산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슬픈 일을 이겨내는 것에는 익숙하다.

아무리 힘든 고통이나 장애도 시간이 지나면 극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내게 이러한 불행들이 없었으면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음도 사실이다.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말하기 좋게 <슬픔을 겪어야 성숙한 인생을 산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위로요 자조의 말에 불과하다.

울퉁불퉁한 길보다 편하고 곧은길이 더 걷기 좋음은 굳이 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죽음에 이르러보지 않은 사람이 죽음의 고통을 알 수 없듯이, 어떠한 과정을 체험해보지 않고 그것을 재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부부관계는 제3자 누구도 알 수 없듯이 때때로 사람은 혼자 이겨내고 마음을 다스려야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주가 되는 몸과 마음의 병이 그렇다.

제 3자가 아무리 아파도 본인만은 못할 것이고, 몸부림치고 통곡한다 해도 본인이 가슴속으로 우는 속울음만 못하다.

젊은 날에 무슨 인생이니 미래니 하고 살은 적 있을까?

그저 순간의 쾌락도 즐거움을 위해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지 이토록 절실하게 인생을 생각했을까?

천년만년 건강하고 행복한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리라는 기대로 살았음을 어찌 부인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왔음에도 이제야 후회한들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조급한 마음에는 검은 빛깔로 물들고 있음이다.

마음은 언제나 착 갈아 앉아있고, 몸은 전성기의 활기를 잃어버렸음을 아는 순간 스스로 늙어가는 모습을 본다.

중년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남들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것들이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함을 아는 순간 스스로 후회와 절망이라는 구렁텅이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아아! 나의 인생이여!

이제는 제발 희망과 행복이라는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




삶의 주도권을 쥐어라



자신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삶에 끌려가지 말고 주도권을 쥐어라.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그렇다.

어렵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지 않는가?

마음을 다잡고 위기라고 생각했을 때 의신의 전환을 통해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해야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전쟁에서도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으면, 자신이 의도 한대로 전략을 세워 상대방을 끌어 들일 수 있다.

유리한 시간과 장소와 사람을 선택하고, 유리한 환경과 우군을 만들어 자신이 의도한대로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산에 오를 때 앞장서서 가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경치나 풍경을 감상하면서도, 여유롭게 쉬고 싶을 때 쉬어가면서 자신의 페이스대로 산행을 즐길 수 있지만,

뒤져진 사람은 쉬는 장소에 도착하여 쉴만하면 먼저 온 일행을 충분히 쉬고 출발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피로를 그대로 떠안고 일행을 따라가야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끌려가는 것이 편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한 번 뿐인 삶인데, 자신의 의지하에 살아야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삶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갈 길을 자신이 선택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분명, 내게 가치있는 것임에도 얻을 수 없음은, 바로 살아가는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같다.

세상 모두를 내 품에 둘 수 없음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다고 자포자기할 필요는 없다.

나는  나의 모두다.

스스로를 한계지우면 무슨 일이든지 나아가지 못하고 머무르게 된다.

일상에 베인 것들이 무의식에도 이루어지는 것처럼, 항상 내가 깨어나 나아갈 수 있도록 나에게 신뢰의 눈빛을 보내자. 




내가 행복해야 주변이 행복하다



우리나라는 가부장적인 사회다.

그렇기에 나름대로 남녀의 지위가 엄격한 사회다.

이부종사니 칠거지악이니 하는 말은 곧 남성 중심적인 사고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이런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우면 가정에서조차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가정에서의 저울추가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옮겨진지 오래다.

예전에는 가정의 대소사는 전적으로 남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한 것들은 남자의 일이였으며, 책무며 의무였다.

하지만 요즈음은 일에서나 역할에서나 남자보다 여자가 해야 할 일이 많아짐에 따라 의사결정의 권한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주변을 돌아보라.

남자는 정년에 이르러 퇴직하게 되면 마땅히 할 일이 없다.

하지만 여자는 식당이나 파출부등 소소한 일에서부터 가능한 일이 널려있다.

본인의 의사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나이든 남성을 채용하는 업종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남자가 한 일을 이미 기계가 차지해버려 학원차 운전이나 막노동, 또는 아파트경비와 같은 일이 대부분이다.

여자는 늙어도 자신의 밥벌이는 할 수 있지만 남자는 그렇지 못하다.

아마 우리나라도 이젠 부계사회라기보다는 모계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측면이 강하다.

전통문화의 가치에 의해 큰 틀은 유지하고 있지만 여성의 발언권이 각 분야에서 급속히 강화되고 있다. 

그렇기에 결혼관이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

요즈음은 황혼이혼은 이미 보편화되었고, 자식들의 출가 뒤 중년의 이혼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랑이 밑바탕이 되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유지해왔지만,

자식들이 출가한 뒤에는 서로의 가교역할을 담당하던 아이들이 떠나고,

서로를 바라보고 기대해왔던 서로에 대한 구속의 끈이 약해질 수밖에 없기에,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역시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관계가 되고,

같은 집에 살지만 자식이나 이웃의 눈이 무서워 남이 아닌 남이 되어버린 가정도 비일비재하다.

난 중년의 남자다.

그렇기에 요즘 이 세태의 중심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늘 불안하고 마음으로 답답함과 울분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는 스스로에게 연민을 금할 수 없다.

사람이 서로에게 잘 한다는 것은 한도 끝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이면 될 것 같지만 살아가면서 눈높이가 달라지고 기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또는 사회에서도 상하관계나 장유유서와 같은 수직적인 질서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명령이 거의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된지 오래다.

초등학생이 대통령에게도 뒤돌아서 서슴없이 욕하고, 자신이 일을 시켜야할 직원에게도 인간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질서가 무너져 있다.

내 자식에게 2등이 되는 법을 가르치기 않았기에 모두가 앞에 나서려고만 한다.

스스로 자식들 교육비에 부담을 느끼는 부모도 말로는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을 잡고 돈을 벌기를 원하지만 자기 자식은 열외다.

교육도 정말 그 분야에 재능이 있고 무엇인가 성공이 가능한 사람에게 투자를 해야 하는데, 내 자식이면 무조건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지만 서로가 조금은 냉정할 필요가 있다.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우선 저지르고 보면 반드시 후회하기 마련이다.

자식들의 문제나 부부관계의 문제나 뒤를 돌아보는 지혜와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화를 내고 돌아선 사람이지만 한동안은 서로의 이름과 사랑을 가슴에 품고, 서로의 행복과 기쁨과 건강을 지켜주던 사람임을 잊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날마다 자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담아 더해주지는 못 할망정 원망이나 슬픔을 주어서야 되겠는가?

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다짐할 필요가 있다.

늘 강조하는 말들이지만 세상은 내가 행복해야 주변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처럼 질서가 흔들린 때는 없었다.

결혼할 상대가 없어 나이든 노총각 노처녀가 넘쳐나고 있다.

양육비 부담이 너무 커 아이를 낳지 않는 신혼부부도 많고, 자신의 노후자금도 없어 초라한 노년을 보내야 하는 우리의 부모와 자신의 모습도 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린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가정, 나의 부모, 나의 아내와 남편과 자식들, 서로에게 속한 부분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이 혼란한 작금의 세태에서 중심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충실하면 한다.

내가 흔들리면 지금까지 자신이 사랑하고 지켜온 모든 것들이 사라짐을 잊지 말라.





작은 성공을 즐겨라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모르지만 반드시 겪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다. 

청소년 때의 사춘기 경험이나, 지식이나 경험을 쌓는 학창시절,

그리고 결혼적령기에서의 반려자에 대한 고민과, 결혼 후 자녀의 양육문제,

또 부모에 대한 부양의 문제, 자신에 대한 노후문제 등, 언제나 걱정거리를 떠안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늘 불만이 쌓이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 하겠다.

불만은 이런 현실을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우린 대부분 눈에 확 들어오는 성과를 얻어야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커다란 성공이 어디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린 작은 성공을 즐길 필요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 차 한 잔을 마시는 즐거움이나, 창가에 스며드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주는 나른한 느낌.

또는 아이들과 식탁을 마주하고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여유로움과 같은

소박하고 단순한 것들에게 감사하는 즐거움을 즐겨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늘 호흡으로 마시는 공기와 같아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스스로 이런 느낌의 찾는다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 깊이 가득차오르는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고, 이것저것 마음으로 신경 써야 하는 것에 대한 불만만 간직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불안해지고 시간에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족쇄가 되어 오히려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내가 얻는 작은 성공에 늘 감사하고 즐거워하라.

그러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행복한 얼굴이 되어 주변사람들에게 늘 부러움을 받는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얼굴은 마음의 거울과 같다.

고통스럽거나 힘들면 인상을 찡그리게 되고, 행복을 느끼면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이런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은 늘 우리의 얼굴을 포근하게 만든다.

또한 마음의 안정을 가져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마음의 건강이 육체적인 건강보다 더 필요한 것은 육체는 마음먹기에 따라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육체미를 뽐내는 사람이라도 마음이 병들었다면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듯 마음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착이나 탐욕을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스스로 너무 잘못을 물으면 살아가는데 재미를 잃게 된다.

스스로 주어진 일에 재미가 있어야 일을 하면서 즐길 수 있다.

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매사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타인의 의견과 생각을 인정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좋다.

나와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다 해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라.

사람마다 본 것이 다르고, 느낀 것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 다르다.

그런데도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불편해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남의 존재를 인정해야 비로소 나의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껴야 일상 속에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부모와 형제자매와 아내와 아이들 역시 각자의 사람으로서의 몫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판단으로 상대방의 생각을 통제하려는 행동을 하기 보다는, 대화를 통해 함께 생각을 맞추는 노력을 기울려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 이제부터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즐기자.

그리고 그 일의 결과로 얻어지는 결과가 작은 성공일지라도 만족하자.

잘된 것이든 잘못된 것이든 그것들은 나로 인해 생긴 것임을 잊지 말자.


정용화



외로운 사람



사람은 사람이 없어서 외롭기도 하지만 사람이 많아서 외롭기도 하다.

사람은 많은 사람 속에 둘러 쌓여있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사람은 혼자 있으면 홀로인 듯하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스스로 몸이 한 번이라도 아파본 사람이라면, 사람은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나는 몸이 아파 끙끙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데, 자신의 몸과 같다고 믿었던 가족들이 옆에서 하하거리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볼 때는 솔직히 배신감마저 들게 된다.

나 역시도 그렇다.

아무리 지인이 아프고 괴로워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배설의 욕구를 느끼면 배설해야 하고, 웃고 떠들 수밖에 없다.

이런 본성 때문에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고, 고통도 덜어지게 마련이다.

한 때 서운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을 잊지 않고,  상시에도 기억한다면 사람은 아마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조금은 눈치 없고 모자란 듯 보이지만,  때로 자신을 들어내고 허허 웃어 보는  것 ,정신 건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혼자 살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가 쌓아올린 온갖 관념과, 상상으로 둘러쌓인 마음의 벽을 먼저 허무러라.

스스로 마음속으로 하지 말아라 할 것들을 제한시켜놓으면, 스스로 벽을 털어내지 못한다.

이러한 마음의 벽들이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켜 혼자라는 외로움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어울림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면에서는 집단이기적인 성격도 있지만 예로부터 상부상조는 미덕이었다.

그래서 경조사 때 찾아오는 사람의 수나 면면을 보고 그 집안의 가세를 점치기도 했다.

이 모두가 그 집안 사람들의 인간관계나 됨됨이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경우가 바르고 예의를 다하면, 당연히 찾아오는 발걸음이 많아지게 마련이지 않겠는가?

중국에서도 여불위나 양상군처럼 집안에 식객을 두고 예우한 경우도 있었고,

권력자나 위정자들 역시 대문이 닳을 정도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 그 권위를 유지하고 없다.

권력이나 명예나 다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오순도순 식탁에 모여 김치찌개를 한 냄비 끓여서 함께 식사를 하는 풍경은 너무도 정겨운 모습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러 사람이 모여 삽겹살이나 양념갈비를 구우며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그러면서 한 쌈씩 싸서 서로 권하고 먹여주는 광경은 절로 입가에 행복을 떠올리게 한다.

외국인들은 위생을 말하지만 고온으로 익힌 음식이 무슨 문제가 있을까?

모두가 생각의 차이 아닐까?

나누고 아끼는 정이 돈독해지고, 서로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줄어든다면, 오히려 위생을 걱정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예로부터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경조사나 명절에는 서로 음식을 나눠 먹음으로써, 이웃과의 정을 돈독히 하고 주변에 가난한 사람이 배가 골지 않도록 하는 속정 깊은 마음이 있던 우리다.

예전에는 칵테일 바나 스탠드바 등 홀로 술을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유행한 적 있는 것 같은데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것 같다.

친구와 이웃과 지인과 함께 떠들썩거리며 먹어야 술 맛이 나는 우리의 음주문화나 습관이기도 하다.

이것 역시 어울림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먹은 술값이나 음식값을 서로 내려고 하는 나라는 아마 우리나라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다소 불유쾌한 일이겠지만

한번 쯤 그렇게 돈을 쓰는 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마음의 문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피하려고 하는 데에서 오는 문제지 마음만 먹으면 한번쯤 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러고 싶지 않으면 자신이 먹은 것만 내면 되지 않는가?

자신이 먹은 것도 내지 않으면서 항상 좋은 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술에 취하면 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선동하듯 부추기는 말만 많은 사람은 정말 싫다.

서로가 원해서 2차 3차를 갔으면 한번쯤 사는 것이 예의며, 주머니 사정만큼 산다 해서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어울림 문화에서의 남자의 처세술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 사람은 몇 사람만 모이면 계를 만들거나 동창회니 무슨 동호회니 하고 모임을 만든다.

모임의 성격이야 뜻있고 건전하게 만들어졌지만 대부분 어떻게 잘 먹고 노느냐에 있다.

쉽게 말하면 똥집이 맞는 사람끼리 어울릴 수 있는 공간 확보에 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나 이익이 되면 금상첨화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남자는 사회에서 소위 말하는 행세를 하고 살려면 이런 모임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를 활용하고 인맥을 넓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처세술이다.

사람이 눈과 귀와 두개인 것은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위해서고,

머리가 하나인 것은 다투지 않고 바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모임 역시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이런 어울림 문화가 사회에 적응하여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음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

난 때때로 투덜거리기도 하고, 어울림이 버겁기도 하지만 오늘 또 어김없이 모임에 나간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나의 생각과 뜻이 함께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기에 그렇다.




성격과 충고에 대하여



누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 한가지씩을 갖고 산다.

그것은 본성이다.

흔히 성격이라고 정의되는 본성은 개인이 갖고 있는 본연의 품성으로 결코 주변의 환경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

즉 성격은 사람마다 고유의 색깔이다.

그래서 사람은 각자가 하나의 소우주며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흔히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에 대해 깊이 연구해 본 바도 없다.

다만 나 자신과 살아오면서 사람을 겪어본 경험상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자기고집이 세고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보면  “제발 성격 좀 고쳐라.” 하고 말하지만 성격은 그렇게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식과 새로운 것들과의 조화를 통해 변화하는 것뿐이다.

이런 변화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물불을 안가 릴 정도의 위급한 상황이나 과격한 흥분상태가 오면 자신도 모르게 본 성격으로 돌아간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순진하기만 한 사람이 술만 취하면 말이 많아지고 화를 내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세상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일에는 나서기를 좋아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면 주저하게 되고 위협을 느끼면 화를 내거나 피하는 것처럼, 은연중 자기보호본능을 갖고 있다.

혼자 있거나 지인들과 있을 때와 낯선 타인과 함께일 때의 행동은 분명히 다르다.

누구나 다 가식이란 가면을 쓰고 사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익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는 몸에 맞지 않는 옷과 화장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가급적이면 호의적으로 보이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 교육의 결과다.

소질과 특성을 개발하기 보다는 대부분이 화를 억누르는 인성교육을 먼저 배운다.

요즘은 자기 자식이 최고라고 사회적 윤리교육을 너무 안 가르쳐서 탈이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교육받는다.

이와 같이 성격은 부모나 사회의 교육에 의해 공공의 목적에 부합되게 순화되는 과정을 겪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약점을 공격당하거나 성격에 대해 말하면 화를 내게 마련이다.

그 사람의 충고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실 기분이 나쁘다.

무엇인가 상대방에게 약점을 잡힌 것 같고, 안보여줄 것을 보여준 것처럼 속이 불편해진다.

그러면 알게 모르게 그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되고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충고도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젊은 날에 하는 것이다.

스스로 가치관이나 인간관, 사회관이 정해진 뒤에 하는 충고는 어쩜 도리어 손해를 자초하는 일이다.

타인이 나와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도 않을 거라면, 자신의 입장에서 하는 충고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자기 생각에는 객관성을 갖고 충고했겠지만 은연 중 자신의 생각이 가미될 수밖에 없음도 인정해야 한다.

충고는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충고를 하려면 사전에 그에 대한 충분한 자료나 사례를 준비하여야 함은 물론,

자리와 환경을 고려하여 설득과 이해를 반복하는 것이 옳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는 왕도가 없다.

 가난한 사람이 항상 그 자리에 머무르라는 법도 없으며, 학창시절 공부 좀 못했다고 부자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때문에 가면이든 가식이든, 스스로 판단해서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살아가는 것도 자신이 중심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타인의 가치를 흔드는 말은 가급적 삼가는 것이 옳다.

그저 겸허한 마음으로 주어진 자신의 길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세상은 왜 개인의 삶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는 걸까?

막상 위기에 닥치면 도와주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봐 경계의 시선이라도 보내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놔두면 어련히 알아서 자신의 일을 헤쳐 나가련만

세상은 열일을 마다하고 찾아다니며 참견한다.

그러다 자신의 의도대로 흐르지 않으면

버럭 화를 내고 돌아서서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마구 욕을 하거나 짜증부리고 심술을 낸다.

마치 세상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없는 것처럼...

과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미래조차 없다 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뻔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도

현재에 조금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힘으로 어찌해보려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 했다.

과거에 가난했거나 불행했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의 나로 성장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다가올 미래 역시 과거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상엔 독불장군이란 없다.

살아오면서 우연이든 필연이든 알게 모르게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거나 주면서 살게 마련이다.

현재 자신이 남보다 우월한 경제적 능력이나 지위를 가지고 있다 해도

밑바탕은 자신이 자라온 과거의 과정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남에게 도움을 준 것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남으로부터 받은 것은 반드시 기억하고 가능한 한 기회가 오면 도움을 아끼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현재의 행복과 풍요가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경제적 여유가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생각을 돌리면 피안이란 말이 있다.

진정한 행복은 바로 마음의 즐거움인 것이다.

몸이 편하다고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신세 진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바로 마음의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거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남의 일에 불쑥불쑥 끼어들어 도리어 남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행동은 결국 자신마저 나락으로 밀어 넣는 자충수가 될 수 있으므로 경계하고 삼가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처럼 항상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는 습관을 들어야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남이 가지지 못한 다른 것을 가졌을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나의 행복은 바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딛고 일어선 결과일 수 있음도 잊지 말고, 항상 더불어 행복할 수 있도록 행복을 나누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연연해하는 것은 과거이고, 가장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미래이며, 가장 소홀히 하기 쉬운 것은 현재이다.

과거는 이미 흘러간 물이 되었으니 얽매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과거 없이는 현재도 미래도 없는 것이기에 때때로 반추해 보면서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미래는 아득하기가 마치 바람을 손으로 잡으려는 것과 같이 바랄 수가 없어도,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자신이 소망하는 미래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바꾸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

미래는 안개 속 미로와 같은 마음속의 희망이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변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미래다.

그러므로 현재의 행복이 바로 미래의 행복인 것이다.

스스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이미 행복이 곁에 와 있어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희미한 과거의 꿈만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허망한 미래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 있어 현재란 그리 중요하지가 않다.

아름다운 과거로부터 멀리 떠나온 과정이거나, 꿈에 부푼 미래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만 생각한다.

그들은 과거 때문에 현재를 미워하고, 미래가 있기에 현재를 소홀히 여긴다.

그러므로 현재 내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던 간에 주어진 자리에서 심념을 다해 노력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을 허물하고 하늘을 원망해도 잃어버린 과거가 돌아오는 법은 없다.

또한 장미 빛 미래도 결코 오지 않는다.

과거나 현재, 그리고 미래는 모두 시간이 구분지어 놓은 자신의 경계일 뿐이다.





처음이 끝과 같아라



세상에서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아래로 볼만한 사람은 없다.

자기가 판단하기에는 한두 가지는 비교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어느 한순간부터는 그것마저 모호해져 장점과 단점이 뒤바뀌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란 격언이 딱 맞는 말인 것을 살아갈수록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인생의 승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자신감이라 했다.

자신감은 스스로의 긍정적인 생각에서 오기도 하지만 타인과의 비교우위나 자신의 어떠한 목표를 달성했을 때 생기는 마음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자가당착에 빠져 자신이 최고인양 행동하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옛 어른의 말씀처럼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했다.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야 남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상대로 인정할 수 있는 덕이 생기는 것이다.

졸부는 어느 좌석에 가서도 재산이 많음을 자랑하고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타성에 젖어 모든 것을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상대의 능력을 재단한다.

또한 덜 여문 지식을 가진 자 또한 지혜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도 별로 잘생기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미추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깊이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사람을 욕하기에 앞서 한번 그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눠 보는 것도 사람을 제대로 평가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입관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없다.

선입관도 일종의 가치관이다.

가치관은 일반적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직간접적으로 눈으로 보거나

책이나 부모 또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지식이 자신의 생각과 결합된 것이다.

요즘과 같은 다양성의 사회에서는 부모나 스승의 세대에서는 옳다고 정의되었던 사실도 변화하게 마련이기에 가치관의 혼동이 생기게 된다.

따라서 가치관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그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식의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져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게 된다.

그래서 타인에게 상처로 남는 말을 주저 없이 하고서도 미안하다는 느낌조차 느끼지 못하는 철면피가 되는 것이다.

오로지 내가 아프지 않으면 그만이고, 나만 즐겁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남의 몸에 난 큰 상처보다 내 몸에 난 작은 종기가 더 아픈 법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이해는 하나 마음으로 절박하게 느끼지 못하고, 힘 있는 사람은 약자에 대한 도움조차도 힘으로 하려 한다.

진정 그네들이 바라는 것은 마음의 다가와 주는 것임을 그들은 진정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선행이 아니다.

선행이나 도움은 타인의 입장을 헤아려 마음상하지 않게 배려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분명히 나는 도움을 주었다 생각하지만, 그 도움을 받은 당사자는 전혀 그것을 고맙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우린 종종 마주 대하게 된다.

그러한 입장 차이가 오히려 독이 되어 친근하던 사이를 멀어지게 갈라놓을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자신의 경쟁상대는 항상 멀리 있지 않다.

가급적이면 친구나 이웃이 경쟁상대가 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그 결과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반복하고 산다.

그리고 사람은 항상 위를 바라보고 살아가기에 늘 힘에 겨워하지만,

사실 내가 이미 아는 사람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로 ‘내 편’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처음 대하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얼굴이며 행동거지다.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찡그린 짜증이 묻어나는 표정보다 밝고 미소 띤 표정이 남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다.

스스로 타인을 선입관을 가지고 판단하려는 마음을 버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타인에게 어떤 선입관을 심어 주느냐? 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항상 스스로 마음이 유쾌해지도록 생각의 전환을 통해 나의 선입관을 관리하는 습관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이 끝과 같아라.” 란 말처럼, 처음의 느낌이 평생을 좌우하기도 함을 아는 사람이, 바로 인생의 승리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는 동경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미지의 세계는 누구나 가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인의 의지가 우선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선택받은 자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특히 친목회나 동문회와 같은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의 리더는 특히 그렇다.

구성원의 협조와 도움이 절대 필요로 하는 모임은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이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목적이나 취미를 가지고 만난 이러한 모임의 리더로 선택된다면,

거절하지 말고 한번 쯤은 인생의 필수 여정이라 생각하고 경험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자신은 이성적 생각을 한다하지만 어느 정도는 다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편중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인색할 수밖에 없음도 사실이다. 

리더의 경험은 이러한 편협한 생각을 타인의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받아들이고,

그 의견과 자신의 생각을 조화시켜 잘잘못을 가릴 수 있는 판단력을 향상시킴은 물론,

모임의 목표에 부합될 수 있도록 전체적인 입장에서 조율하고, 집단적 생각과 결단을 가능하게 해준다.

또한 모임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사안별로 통합적 사고력을 향상시켜 주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함은 물론,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스스로 대인관계의 능력을 키울 수 있다.

그리고 주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접목하여 꿈을 꿀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리더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

인생 역시 그렇지만 자신의 희생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시간이든, 재물이든, 스스로가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늘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앉아 주는 것만 받아먹어서는 결코 남보다 앞에 설 수 없는 것처럼,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자신이 평소에 갖고 있는 생각과 소신을 제대로 실현할 수 없다.

리더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 않으면 혼자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어도 그것은 죽은 생각과도 같다.

스스로 걸어가 보지 않는 길은 알 수 없다.

산을 올라가는 길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어느 길이 편하고 쉽고 사고 없이 오를 수 있는지는 몸으로 직접 체득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얻은 지식이나 경험은 그만큼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처럼 어느 모임을 진정으로 아끼고 발전하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리더가 되어 이끌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묵묵히 뒤에서 보조하고 협조하는 것도 회원으로서의 당연한 역할이지만,  주도적인 입장에서 앞장서 책임을 지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뒤에 숨어버리지 말고 스스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가치관을 갖고 리더에 도전함은, 아마 스스로 색다른 경험과 의욕 넘치는 일상의 활력소가 되리라 생각한다.

모임을 이용하여 자신의 치부나 권력을 얻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서는 안 되지만,

그것이 기반이 되고 경험이 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모임을 위해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모임을 운영해보면 꼭 발언할 수 있는 총회에서는 말 한마디 하지 않다가

합의되어 시행하면 이러쿵저러쿵 뒷담화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회원으로서 반드시 고쳐야 할 덕목이다.

어떠한 일을 새롭게 경험하는 일 만큼 기분 좋게 하는 일은 없다.

자신에게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세상사 모두 생각하기 나름이다. 란 말처럼 리더가 된다는 건, 바로 나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는 일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것은 귀찮음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즐거움도 함께 선물한다.


김희선



사랑에는 환상이 필요하다



연애기간이 긴 커플들이 결혼에 성공하는 확률보다 헤어질 확률이 더 높은 이유는 바로 이런 사랑의 환상이 깨져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정과 사랑이 다른지도 모른다.

우정은 오랜 세월이 지나갈수록 된장처럼 구수한 맛이 나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잠시의 별리라도 가슴이 아파오는 그리움의 열병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옅어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가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하루, 한 달, 백일 등등, 기념일을 챙기고 이벤트를 해주는 등 항상 시선과 관심이 사랑에 머물러있어야 한다.

마음이 움직이듯 사랑 역시도 움직이는 것이기에 몸이 멀어지면 사랑 역시도 그만큼 멀어지게 됨은 정한 이치다.

물론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차이는 다르겠지만 항상 서로를 향해 있어야 자신의 사랑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엄마 아빠는 진정 서로가 사랑해서 평생을 살았을까?

나 역시도 그렇지만 부부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면 어떤 때는 남보다 못한 경우도 많았던 것 같다.

늘 서로에게 부족함이 많았고 각자 서로에 대한 연민과 슬픔을 안고 사셨던 것 같다.

자식이란 매개체를 통해 어머니 아버지만 존재할 뿐 여보 당신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때때로 사랑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정도의 서로에 대한 염려가 자리하고 있기도 했지만,

가슴을 울릴 정도로 서로 사랑한다는 절절한 느낌은 못 느꼈었다.

아마 그래서 부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믿음이요, 이해요, 배려가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알세라 모를세라 항상 뒤에서 은은하게 서로를 챙겨주는 모습이 더 보기가 좋은 것은 아마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도 난 아버지가 진정 삶을 행복하셨을까? 에는 의문이 든다.

자신이 부모가 경험한 그 상황에 처해야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렇게 중년이 되어서야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음은 안타까운 아픔이다.

아버지란 존재는 늘 고고한 척 그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늘 외롭고 고독한 존재다.

때문에 시대를 함께 한 어머니가 챙겨주지 않으면 아마 아버지는 한시도 살지 못했으리라.

아무리 자식이 부양해도 어디 어머니의 손길만 하겠는가?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엄마만 있으면 되었다.

엄마에게는 말만 하면 나의 어떤 어려움도 바로 해결해줄 수 있는 척척박사였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그리고 가지고 싶은 것은 엄마에게 손만 내밀면 되었다.

이렇듯 자식에게 모두를 줄 수 있는 것이 어머니의 사랑이기에 어른이 되어서도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의 모습만 떠올려도 그리움에 목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의 크기만큼 보답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슬픔을 간직하고 산다.

늘 죄스럽고 안타깝고 그러면서도 마음가득 연민의 아픔을 간직하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 부모에 대한 사랑인 것 같다.

사람은 각자 다 자신만이 그리는 삶을 살기 마련이다.

그래서 남에게는 초라하고 우습게 보일지라도 자신에게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의미가 되기도 한다.

사랑 역시 그렇다.

그래서 “제 눈에 안경” 이란 속담이 있는 것처럼

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지만 그들에게만은 최상의 연인인 것이다.

사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들만의 성(城)을 쌓는 작업이다.

자신들만의 비밀을 공유하고 자신들만의 아픔을 넘겨야만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어쩌면 사랑은 둘이 만든 시련을 끝까지 견뎌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풋사랑이든, 짝사랑이든, 아니면 성공한 사랑이든 사랑에는 반드시 기승전결이 있게 마련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환상이 깨진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의 환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늘 이별의 쓰라림이 있음에도 또다시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은 늘 사랑이 주는 환상을 그리워해서다.

사랑이 나이와 무관함은 바로 마법과도 같은 환상을 경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을 할 대상이 있다는 것, 사랑을 할 존재가 내게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산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잊혀진 사람이란 말이 있다.

소의 지인에게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바삐 잊기를 바라는 사람이 된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일까?

절실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은 마음에 묻게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마음속에 간직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다사다난하고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그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타인의 기억 속에 어떠한 이미지로 기억되느냐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행복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반대로 떠올리는 기억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불안해지고, 우울한 슬픔이 자리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살면서 스스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도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

나로 인해 마음 아파할 사람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죽어서 단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면 어찌 살아생전 불행한 삶만 살았겠는가?

쓸데없는 자신의 생각으로 주변 사람 모두를 힘들게 하고 나만의 마음의 울타리 속에 가두고 살아왔는지 스스로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싫으나 좋으나 사람의 인생은 서로가 서로에게 얹혀서 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무 모질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내 마음속에 사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불행하기보다는 행복할 수 있기를 간구하지어다.

삶이란 언제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만을 동경하며 사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이라면 굳이 삶이란 하지 않을 것이다.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이 적당히 섞여서 서로의 가치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 바로 삶이란 정글이다.

그렇기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는 바로 이런 삶들이 함께 모여 있는 것이다.


강호동




사랑만으로



내게 와줘서 고맙소.

내가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맙소.

늘 곁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고,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소.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도 당신과 다시 만나 지금처럼 살고 싶소.

이 세상이 아름다운 건 당신이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내가 일생동안 기쁘고 행복했던 것은 당신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소.

이렇게 한 평생을 사랑만을 담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말로 몸으로 표현하는 사랑만으로 진솔하게 상대방을 감동시킬 수 없듯이,

세상은 수많은 인연들이 얼키고 설켜 갈등과 불신을 품고 있기에 진심이 진심으로 전달되기란 어렵다. 

남자라면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정말 한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엄마 같고 누이 같고 친구 같은 아내다.

여자 역시 그럴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어울리는 부부는 서로 자라 온 환경이 비슷하고, 생각이 비슷하면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너무 자라온 환경이 다르면 친가와 처가 가족의 불화의 원인이 되고 점차 사랑의 틈이 벌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결혼하여 잠깐 살 것이 아니라면 가급적 서로가 닮은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 옳다.

사랑은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어야 지속적인 사랑이 유지되는 것이다.

사랑만 있으면 되지 조건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란 철모른 사람들의 어리광에 불과하다.

일생을 함께하는 배우자의 선택인데 가능하다면 갈등을 줄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서로 성격을 맞추고 이해한다는 것은 살아보면 생각만큼 쉽지 않다.

곁으로 들어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할 수 없고, 사랑이란 포장지에 싸여진 사람은 당사자에게는 세상에서 최고로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이다.

조금이라고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살이만큼 어려운 것도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이 산다는 건 먹고 입고 자고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일상에서 기쁨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만족의 성취감과 행복과 보람을 느껴야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얻기란 정말 어렵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불행이란 놈이 슬며시 머리를 디밀고, 하나를 해결했다 싶으면 어느 사이엔가 또 다른 어려움이 다가온다.

정말 행복 하고 싶은데...

정말 사랑만 하면서 살고 싶은데...

사람의 마음은 요지경이라 한 곳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는다.

태양이 떠올라 밝음과 어둠으로 나누어지듯이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변해간다.

요즘은 가급적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를 쓰지만 쉽지 않다.

생각들이 헐벗으면 마음이 가난해지고, 마음이 가난해지면 몸은 움추러들게 마련이다.

혼자라는 사실을 거듭되면 스스로 외부의 다른 생각과 마음으로부터 단절되기 쉽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은 말에 상처받고 그것이 싫어 현실로부터 달아나려고만 한다.

사람들과 사랑만으로 살고 싶다.

마음을 숨긴 채 하고 싶은 말조차 하지 못하고 뒤돌아서 후회하지 싶지 않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떨리고 마음마저 황량해지는 이 겨울에

사람들이 인정이 살아있는 따뜻한 사랑 안에 머물고 싶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탁에 둘러않아 정감 있는 얘기를 오순도순 나누는 사람 사는 냄새를 느끼며 살고 싶다.



령혼™

단상·칼럼·포토에세이·저널리스트 김진철 웹사이트

    이미지 맵

    단상 다른 글

    댓글 0

    *

    *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