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새론 데뷔작은 "여행자"다

김새론 데뷔작, 여행자 포스터


김새론, 데뷔작, 여행자 스틸 컷


김새론의 데뷔작  ”여행자”


9살 소녀 진희(김새론)는 아버지 (설경구)에 의해 보육원에 맡겨진다. 아버지가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 믿었던 진희는 차츰 버림받았다는 현실을 깨닫게 된다. 밥도 먹지 않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지 않던 진희는 같은 처지의 친구들과 서서히 어울리게 되고 특히 몇살 나이 많은 숙희(박도연)와 단짝이 된다. 그러던 숙희가 해외로 입양 가게 되자 진희는 다시금 외로움에 빠져든다.

인생을 외로운 여행에 비유한다면 <여행자> 속 아이들은 지나치게 일찍 여행길에 나선 경우다. “여행 보내준다”는 아빠의 말을 믿고 보육원에 따라와 홀로 남겨진 진희 또한 마찬가지다. 보육원에서 진희는 혼자서 묵묵하게 삶의 여정을 걷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언제 입양 나갈지 모를 친구들과 적당히 관계를 맺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법 말이다. 화투점으로 운세를 떼어보는 것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는 작은 방편이다. 그래도 아직 진희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버지가 자기를 데리러 올 거라는 희망 또는 미련이 깃들어 있다. 때문에 진희는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입양을 가야 한다”며 보육원을 찾는 외국인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숙희처럼 영악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물론 그 희망의 대가는 스스로를 무덤에 파묻고 싶을 정도로 가혹한 법이지만.

알려졌듯 <여행자>는 우니 르콩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과장된 감성의 회고담인 건 아니다. 르콩트 감독은 효과적인 영화적 장치를 사용하면서 섬세하고 절제된 연출력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진희가 부르는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는 각각 복선과 클라이맥스로 기능하고, 아이들이 입양갈 때마다 친구들이 합창하는 <작별>과 <고향의 봄> 또한 대사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 르콩트 감독은 진희의 내면을 설명적으로 풀어나가기보다 멍한 눈빛과 거친 행동을 통해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임에도 이 영화가 러닝타임 100분 내내 서정적인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은 잘 구조화된 시나리오와 정성어린 연출 덕분이다.




<여행자>를 말할 때 배우들의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진희의 아버지로 나온 설경구나 의사로 출연한 문성근은 분량이 적긴 해도 영화에 안정감을 부여했고, 보모 역의 박명신과 예신 역의 고아성, 숙희 역의 아역배우 박도연 또한 탄탄한 연기력으로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진희 역의 김새론이 있다. 유난히 초롱초롱 빛나는 이 꼬마 아이의 외로운 눈망울을 붙잡아낸 것은 감독이지만, 물 흘러가듯 자연스레 캐릭터에 동화된 김새론의 연기가 없었다면 <여행자>는 허술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진희가 이 험난한 여행을 끝내 씩씩하게 해낼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 또한 김새론의 맑고 깊은 눈동자 때문이리라.

우니 르콩트의 <여행자>를 보고 스스로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김소영 감독의 <나무없는 산>에 대해 아쉬움을 적은 적이 있던 터라 이 영화에 별다른 불만이 없을뿐더러 꽤 감동을 받은 자산에게 놀랐다. 물론 <나무없는 산>이 못 만들었다는 게 아니다. 그 영화에도 충분히 감응했지만 뭔가 더 보여줄 것이 있는 상태에서 끝났다는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몇달 전 이 칼럼에서 나는 그 영화가 고양이나 탈진 비슷한 경험에 관객을 이르게 하기 위해 조금 더 밀어붙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오픈 엔딩이라고 해도 그 미덕은 이미 오래전에 숱한 영화들에서 비슷하게 소진한 상투형이 될 위험은 없는 것인가, 라고 질문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여행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게 될 줄 스스로 예상했던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진희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버려지고 거기 적응할 즈음 프랑스 사람들에게 입양된다. 영화는 거기서 끝난다. 김새론이 연기하는 진희의 투명한 얼굴, 공항입국대를 거친 아이의 망설임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에서 화면이 멈추는 것이다. 그때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물론 하나의 이야기의 완결 지점으로 그 장면은 적정했다. 이제 그애에게는 인생의 다른 서막이 펼쳐질 것이다.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는 거기서 멈춘다

<여행자>의 품격은 등장인물에 거리를 두는 시선의 절제에서 생긴다. 하나의 그림처럼 뭔가를 그려놓았으니 관객이 온전히 감상하라는 태도의 산물이다. 알다시피 영화는 이 거리감을 좁힌 예술이다. 대륙과는 달리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거리감, 하나의 예술 대상으로 거리감을 두고 감상하는 전통이 약했던 신흥자본주의 강국 미국에선 예술작품 속의 등장인물에게 밀착하는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미국영화의 품격은 숱한 시점 화면과 매치 컷의 교환 속에서 몰입과 거리감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데서 나온다. 당연히 <여행자>에는 그런 시도가 없다. 흔히 말하는 예술영화 스타일이다.

이 절제는 미학적으로 타당하더라도 식상한 구석은 없는 것일까.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는 화제작들 대다수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시간을 압축한 미국영화의 주류양식에 대항하여 시간예술의 속성을 강조하는 긴 호흡의 영화가 여전히 대세인 것이 현실이다. <여행자>가 꼭 형식주의 영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절제는 시점 화면의 남용을 경계하는 감독의 태도에서 나온다. 진희는 고아원에 와서 자신의 고통을 조금씩 객관화하는 방법을 배운다. 흔히 성숙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는 단계를 거치는 것인데, 자전적인 체험에 기초한 영화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감독은 놀라운 거리감을 유지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희미한 기억을 재생하는 방법론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전통적인 대중영화의 문법대로라면 이 영화는 꽤 컷수가 모자라는 영화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 아버지와 헤어진 진희가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는 때는 건강검진을 하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인데, 그때를 빼면 진희의 감정은 외형적으로 폭발하지는 않는다. 의사 선생님에게 진희는 아버지가 새엄마와 결혼한 뒤 장난치다가 의붓동생을 다치게 할 뻔한 사건 때문에 자신이 고아원에 오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진희가 질투로 의붓동생을 죽게 하려 했다고 부모님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때 진희는 꾹꾹 참고 있던 슬픔을 눈물로 펑펑 터뜨린다.

필사적으로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진희가 그걸 포기하게 된 것은 원장이 진희의 고향마을을 다녀온 뒤 아버지 식구가 이사 갔다고 말해준 뒤부터다. 그 이후로 진희는 고아원에서 사귄 언니 숙희와 더 친해지는데 이 아이는 미국으로 입양하기 위해 일부러 예쁜 척하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는 현실적인 아이다. 그 아이와의 우정에 의지해 고아원 생활을 견디던 진희는 함께 입양가리라고 약속했던 숙희가 혼자 떠나가자 다시 극심한 외로움에 빠진다. 고아원 보모가 속이 터질 때 그런 것처럼 빨랫줄에 널린 옷들을 방망이로 실컷 두들겨 패도 상실감이 줄어들지 않는다. 이런 장면들에서 감독은 등장인물들의 시선의 연결을 극도로 아낀다. 어린아이 진희가 마음에 맺힌 포한을 빨랫감을 두들겨 패며 달래는 모습을 옆에서 보모가 물끄러미 지켜보지만 그녀의 감정의 농도를 충분히 전해줄 만큼은 아니다.

나중에 아무도 몰래 진희 혼자서 죽은 새를 묻어준 구덩이를 파내고 스스로 들어가는 섬뜩하고 슬픈 장면에서도 화면의 연결은 담담하다. 아이들과 수녀님들이 모두 성당에 간 사이에 진희는 죽을 결심을 한다. 더이상 세상에서 맺을 인연이 절친한 친구와의 이별로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장면에서 주인공의 심상을 드러내는 인터컷조차도 감독은 극히 아낀다. 외부에서 보면 별것 아니지만 당사자에게는 의미심장한 죽음의 의식을 담담하게 찍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감독이 고도의 지성의 소유자라는 걸 증명하기도 하지만 대중영화로선 지나치게 온도가 차가운 영화가 되게 만든다. 그런데도 어떤 축적된 감정이 생겼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진희가 혼자 프랑스 파리에 내리는 순간, 혼자 살아갈 것을 아이가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 울컥해지는 것이다.

아이의 결단이 있기 까지 숱한 잔인한 정경들이 그 애 앞에서 펼쳐졌다는 것을 나중에야 헤아리게 된다. 친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것은 물론이고 진희가 고아원에서 보는 것은 함께 있던 아이들 중 누군가가 서양 사람들의 입양아가 되어 떠나가는 광경이다. 입양기관 직원과 함께 고급차에 오르기 직전 고아원생들은 작별의 노래를 부른다. 이 장면의 감정적 온도가 영화 전체의 감정적 온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언뜻 가슴 아프고 슬픈 광경이며 눈물나는 상황이지만 그 이전에 이것은 매우 잔인한 광경이다. 입양이라는 배려와 보듬의 형식에서조차 소외된 아이들은 고아원에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도권의 그 후의에 맞추기 위해 아이들은 필사적으로 예쁘거나 잘난 아이로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제도기관의 중재로 맺어지는 이 입양의 절차를 매번 영화는 강조한다. 거기서 기계적으로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별로 슬퍼하지 않는 그들의 눈동자, 하나의 간택이 끝나고 또 다른 간택이 기다리는 고아원에서의 삶의 행로에 적응한 무심한 일상이 있는 것이다.

여주인공 진희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만큼이나 주변 세상에서도 충분히 불행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목격한다. 새의 죽음에서 본 필연적인 생로병사의 운명 말고도 어른들의 질서에서 불가피하게 초래된 약육강식의 질서와 그 속에서 더 나은 인연의 삶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이들의 좌절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고아성이 인상적으로 연기한 절름발이 소녀 예신은 고아원에 자주 오는 한 청년을 짝사랑하면서 남의 집에 식모로 가는 것에 저항했으나 결국은 서투른 자살 시도 끝에 팔려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식모살이를 떠난다. 예신이 자살시도 끝에 살아났을 때 아이들 앞에서 참회하던 그녀는 아이들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에 자신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이제 막 살갗이 닿기 시작한 삶의 쓰라림 앞에서 이들이 보여주는 천진함 때문에 <여행자>는 무섭고도 슬픈 영화가 된 것이다. 감독의 창작자로서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를 이 영화를 보고 새삼 깨닫는다.

대부분 김새론의 데뷔작이 김정범 감독, 원빈 주연의 “아저씨 (The Man from Nowhere, 2010)”로 알고 있으나, 사실 2009년, 우니 르콩트 Ounie Lecomte 감독의, <여행자>다.

우니 르콩트 감독은 서울에서 태어나 9살에 프랑스로 입양되었다. 프랑스국립영화학교 (FEMIS) 영화학도 출신으로,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파리는 깨어난다]에 배우로 출연한 바 있다. [여행자]는 그녀의 첫 감독 데뷔작이며,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모티브로 영화로 만들었고, 주연은, 당시 촬영 시 8살이었던 2008년이었고, 2009년에 개봉을 했으나, 큰 극장에서는 개봉되지 못했고, 작은 독립극장 같은 곳에서 개봉이 되었다. 필자는 당시 김새론의 얼굴이 담겨진 포스터를 보자마자,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설경구



김새론·김유정·크로 모레츠




2010년은 세명의 아역이 한국과 할리우드 미디어를 뒤흔들었다. <여행자>와 <아저씨>의 김새론과 <해운대>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김유정, 그리고 <킥애스: 영웅의 탄생>과 <렛미인>의 크로 모레츠다. 생각해보면 천재적인 아역배우들이 미디어를 뒤흔든 사례가 처음은 아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의 아역배우들에게는 뭔가 새로운 것이 있다.

크로 모레츠는 <레옹>으로 아역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찬사를 들었으나 성적인 대상이 되는 걸 견디지 못했던 내털리 포트먼의 경우와도 조금 다르다. 모레츠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역할을 스스로 즐기며 연기했고, 그것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딤돌이라는 걸 어린 나이에도 잘 이해하고 있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제 연기의 벽에 새로운 벽돌을 하나씩 쌓고 있어요. 벽돌을 하나씩 추가할 때마다 연기도 점점 늘겠죠.” 김새론과 김유정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를 지닌 성격배우로서 성인배우와 동등하게 평가받기 시작한 지금 아역의 대표 주자다.

대체 이 아이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사실 과거를 잘 살펴보자면 이들은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아이들이다. 크로 모레츠는 유아 시절부터 아역으로 훈련받았고, 김유정은 오랫동안 아역배우계의 스타였다. <친절한 금자씨> <불신지옥> <추격자> 등 출연작 수도 상당하다.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은 “천부적”이라고 말한다. “성인배우 뺨치게 상황을 이해하고, 감정 연기도 능숙하게 해낸다. 어린 나이지만 자기 주관도 뚜렷하고 연기관도 있다. 그렇게 천부적인 친구들은 성인배우로 훌륭하게 성장할 가능성이 미리 보인다.” 김새론 역시 아마추어 출신이 아니다. 그녀는 이미 2001년부터 잡지나 CF 모델로 활약해왔다. <아저씨> 이전 김새론이 소속되어 있던 아역 에이전시 관계자는 “아이 때부터 데뷔한 뒤 여러 광고를 통해 이 업계에서는 나름대로 주목도 받았던 배우”라고 말한다. “성장기를 거치면서 일이 조금 떨어지는 시점을 슬기롭게 잘 넘긴 예다. 특히 부모님들이 아이를 위해 좋은 기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원빈



김새론을 알린 영화, “아저씨”



<아저씨>를 본 누군가는, 이정범 감독의 전작인 설경구 주연의 <열혈남아>와 제목을 맞바꾸는 편이 어울린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느 모로 보나 꽃다운 청년인 태식(원빈)이 ‘아저씨’인 근거는 오직 하나, 옆집 소녀 소미(김새론)가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다. 소미를 필두로 영화 속 남녀노소는 일제히 태식을 “아저씨”라고 호명하는데, 이 광경은 아직 소년티가 남은 태식에게 보호자의 정체성을 불어넣기 위해 최면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소녀가 ‘아저씨’라고 불러주기까지 태식은 오랜 시간을 주검처럼 살아온 남자다. 과거에 감히 이름도 욀 수 없는 극비 특작부대의 ‘섬멸요원’으로 복무했던 그는, 작전 후의 보복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숨어산다. 태식 자신처럼 쓰임새를 잃고 초라한 담보가 되어버린 물건들과 함께 기거하는 컴컴한 전당포가 그의 은신처다(우유와 선인장 화분은 드러내놓고 <레옹>을 향한 동경을 표하는 소품이다). 이웃집 소녀 소미는 늘 혼자 노는 아이다. 클럽 댄서로 일하는 엄마가 약기운에 신음하거나 술에 취해 같이 죽자고 할 때 소미는 아저씨한테 달려온다. 길에서 도둑질했다고 추궁받는 소미를 태식이 외면한 어느 날 밤, 소미의 집에는 사라진 마약을 찾는 범죄 조직원들이 들이닥쳐 모녀를 납치한다. 전당잡은 물건 때문에 범인들과 맞닥뜨린 태식은 소미를 살리기 위해 조직의 심부름을 맡지만, 소녀는 이참에 마약 거래 이권까지 차지하려는 장기매매 조직의 소굴로 끌려가버린다. “소미를 찾아도 너희 둘은 죽는다.” 라는 대사를 기점으로 태식의 싸움은 세상의 악에 혈혈단신으로 대드는 전쟁으로 승급된다. 소녀가 아저씨에게 마지막으로 선물한 ‘암흑의 기사’ 카드가 예언한 대로.




유괴복수극 <테이큰>의 리암 니슨과 <맨 온 파이어>의 덴젤 워싱턴 그리고 <레옹>의 장 르노에 준하는 인물 태식은 한국영화계로 치면 설경구나 송강호, 김윤식을 떠올릴 만한 배역이다. 살인기계에 가까운 태식을 원빈이라는 비현실적인 외모의 배우가 연기함으로써 이 영화가 그리는 강도 높은 폭력과 금기는 ‘견딜 만’해진다. 스크린의 잔혹함은 얼마간 미학적 감상의 대상으로 전이되고 아동 착취라는 극도로 불편한 소재의 실감은 완화된다. <택시 드라이버>의 유명한 대목을 연상시키는, 태식이 스스로 머리칼을 잘라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관객은 주인공의 광기에 긴장하는 대신 미모에 감탄하는 한숨을 흘리고 만다. <레옹>과 <맨 온 파이어>와 달리 <아저씨>는 소녀와 킬러가 동등한 힘으로 드라마를 끌어가는 쌍두마차가 아니다. 소미는 어디까지나 인질이며 심지어 때로는 태식을 활성화하기 위해 임한 유령 같기도 하다. 김새론의 얼굴은 여전히 풍부한 느낌을 내지만 전작 <여행자>에 비교하면 박제된 연기처럼 보인다.

경찰과 범죄자들의 생동하는 대사는 <아저씨>의 큰 강점이다. 반면 대화로서의 대사는 현저히 느슨하다. 특히 태식의 대사는 짧은 독백에, 소미의 그것은 긴 독백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태식의 폭주에 충분한 동기를 마련해야 할, 둘의 초반 장면은 감정의 교류가 빈약하다. 감상적 음악이 보완을 꾀하지만 여의치 않다. <아저씨>에서 드러나지 않는 다른 한쌍의 흥미로운 관계는 태식과 타이에서 온 범죄조직원 람로완(타나용) 사이에 잠복해 있다. 냉혹한 킬러 람로완은 첫 만남부터 태식에게 매료된 기색이 역력하며 헨젤과 그레텔의 빵가루처럼 휴대폰을 흘리고 간다. 나이트클럽에서 군중을 사이에 두고 둘이 교환하는 응시는 영화를 통틀어 가장 맹렬하며, 클라이맥스 난투극에 이르면 그가 태식을 공격하는 건지 최후의 독대를 위해 엄호하는 건지 미묘하게 혼동될 지경이다. <아저씨>는 스타일이 선명한 액션으로 관객의 주의를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지갑으로 순식간에 단도를 제압하는 첫 싸움부터, 태식은 상대방 몸의 곧은 부위는 꺾고 마디를 이루는 부분은 혈을 짚듯 칼날을 휘둘러 툭툭 끊어버리는 스타카토 액션을 구사한다. 가벼움과 단호함이 쾌감의 요체다. 그러나 액션의 비중을 고려할 때 증기탕 혈투 외에 인상적인 세트 피스를 더 얻지 못한 점은 조금 아쉽다.

감독의 전작 <열혈남아>와 <아저씨>는 인상은 다르지만 닮은 형제다. <열혈남아>의 재문은 삶을 부지할 핑계를 복수에서 찾고 <아저씨>의 태식은 구출과 복수를 위해 긴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순결한 여성을 위해 피 흘리며 구원을 소망한다. 다만 <열혈남아>가 관객에게 연민을 청했던 자리에서 <아저씨>는 매혹을 구하고 있다.




슬픈, 혹은 무서운 동화 “바비”



감독 이상우의 전작들은 해괴망측하다.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엄마는 창녀다> <아버지는 개다>. 내용은 더 심하다. <엄마는 창녀다>는 아들이 포주를 자임하고 나서 병든 노모의 몸을 팔아 먹고산다는 내용이고 <아버지는 개다>는 한 집안의 아버지가 아들들을 짐승처럼 짓밟고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관련하여 그의 영화에는 강도 높은 폭력장면이 상존하며 동시에 성적 수위도 높아서 성기 노출도 다반사다. 감독은 배우가 그 장면을 해내기를 주저하면 자기가 나서서라도 그 장면의 수위를 지키고 강도를 높인다. 그러한 수위와 강도에 대한 강박이 그의 영화를 늘 감싸고 있는데 그건 이상우 영화의 단점이기도 하거니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의 영화에 대한 인지도를 높인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비>는 벌거벗은 여자도 보기 껄끄러운 성기도 가학적인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순영(김새론)과 순자(김아론)는 정신지체 아버지(조용석)와 함께 포항에서 민박집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작은아버지(이천희)가 한명 있는데 말만 친척일 뿐 해가 되는 게 더 많은 악인이다. 이 작은아버지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미국에서 한 남자를 불러들인다. 미국인은 바비라는 이름의 딸과 함께 순영, 순자의 집을 찾는다. 그의 알려진 목적은 순영을 입양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있다. 순영과 바비는 같은 또래여서 금방 친해지는데 반면 순자는 순영과 바비를 질투한다. 그런 순자는 순영 대신 자기가 미국에 가야 한다며 떼를 쓴다. 결국 순자의 계획대로 순영 대신 순자의 입양이 결정된다.

순영과 순자 역할을 맡은 배우는 요즘 많은 주목을 모으고 있는 김새론, 김아론 친자매다. <아저씨>에 출연하여 관객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김새론과 우연히 <바비>로 배우의 길에 들어선 김아론이 이 영화의 주역이다. <바비>를 두고 이상우 영화의 절대 전환점이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렵겠다. 여전히 감독은 다작을 하고 있고 이 영화는 오히려 예외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동안 이상우 영화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일으키는 흥미로운 장면 하나를 꼽아볼 수는 있다. 순영과 순자와 정신지체 아버지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다. 언뜻 상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서서히 집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카메라의 운동성과 함께 이상우 영화에서는 매우 드물게 순수하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감독 이상우가 성기에 연연하지 않아도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감독이 이런 장면을 확장하는 쪽으로 자기의 영화세계를 구축할지는 미지수다. 이상우 영화의 전반전인 문제로 지적할 만한 부분들이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이다. 우선 극단의 설정과 함께 도입된 인물들의 단순화가 내내 걸린다. 지독하게 못된 인물이거나 지나치게 모자란 사람들 혹은 선과 악이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부류를 지나치게 대칭에 놓는 것은 <바비>를 볼 때 가장 큰 껄끄러움에 속한다. 자칫 철지난 아메리칸 드림의 정서를 가져온 것처럼 보이는 부분도 그렇다.

물론 능동적인 해석은 가능하다. <바비>에서 미국이 아니라 순자의 무서운 욕망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러니까 영화 속 미국 소녀 바비가 말하는 것처럼 “순자 눈만 보면 소름이 끼친다”는 그런 면모에 주목한다면, 이 영화의 중심은 오로지 순자다. 어린 소녀의 그 무서운 욕망이다. 그렇게 보자면 <바비>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허상을 뒤좇는 인물들에 관한 슬픈 동화가 아니라 주체하지 못하는 욕망을 현실화하고야 마는 어떤 소녀에 관한 무서운 동화로도 보인다.





망명의 상처 입은 영혼 <도희야>



‘공직에 부적절한 사생활’로 인해 작은 마을로 좌천되어 내려온 파출소장 영남(배두나)은 마을 사람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채 매일을 술로 살아간다. 하지만 의붓아버지 용하(송새벽)에게 학대받고, 학교에서도 따돌림받는 소녀 도희(김새론)에게 영남의 등장은 구원과도 같다. 도희를 우연히 도와주게 된 영남은 그녀를 용하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며 돌보기로 결정한다.

‘두명의 상처 입은 영혼이 자신의 아픔과 외로움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쉽게 정리하고 싶겠지만, 사실 <도희야>가 건드리고 있는 이야기의 결들은 그렇게 간단치 않다. 영화는 도희와 영남(그리고 영남의 여자친구 은정)을 하나로 묶은 뒤, 이들의 문제를 ‘감정적’ 차원으로 접근하지만, 이들의 대척점에 놓인 불법 이주노동자들과 마을 주민들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적’ 차원으로 접근한다. 이러한 불균질성이 관객의 마음을 힘들게 만든다. 문제는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불러온 여러 문제들이 엔딩까지 미처 다 정리되지 못한 채 남겨지거나, 성급하게 봉합해보려는 시도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배우들간의 연기 톤이 잘 조율되지 않아 떼어놓고 보면 좋았을지 모를 연기들이 겉돌고 만다는 점도 못내 아쉽다. 크레딧에서 제작자로 참여한 이창동 감독의 이름을 발견하니 영남의 차가 빗길을 뚫고 마을로 들어서는 영화의 첫 장면이, 그리고 여주인공이 겪는 일련의 여정이 <밀양>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생각에 힘을 더한다.


영화,나는 아빠다

도희야



우리가 전혀 모르는 비밀의 세계 “맨홀”




강북의 한 동네에서 6개월간 10여명의 연쇄실종사건이 발생한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수정(김새론)은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언니 연서(정유미)를 마중하러 나간다. 연서의 퇴근길 수정과 영상통화가 급작스럽게 끊어진다. 연서는 땅속으로 사라진 수정을 찾아 맨홀 아래 세상을 헤매기 시작하고, 그곳에는 아버지에 대한 강한 트라우마를 간직한 연쇄살인범 수철(정경호)이 정글의 사자처럼 군림하고 있다. 그는 하수구와 어두운 골목을 자유롭게 누비며 새로운 희생자들을 사냥하러 다닌다. 딸을 잃은 아버지와 두 자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좇는 경찰이 힘겨운 추격전과 탈출기를 보여준다.

우리가 매일 지나다니는 길, 그 아래 우리가 전혀 모르는 비밀의 세계가 있다. 흥미로운 설정이다. 무심코 지나가며 본 맨홀의 구멍 사이로 누군가의 눈동자를 발견하게 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신재영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맨홀>은 그런 설정과 장면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심장을 저미는 공포를 좀처럼 경험할 수 없다. 일단 영화는 공포, 혐오, 슬픔, 감동, 유머라는 복잡다단한 감정의 코드들을 난삽하게 배치하고 있다. 그 난삽함은 맨홀 아래 세계의 무질서함과 살인마 수철의 무질서한 살의와 어우러지며 혼란스럽게 전개된다. 수철은 가공할 만한 공포를 생산하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두 자매의 멜로드라마틱한 사연은 생뚱맞고, 딸을 잃은 아버지의 감정은 종종 내팽개쳐진다. 너무 많은 인물을 맨홀로 들여보내서인지, 맨홀 아래 세계를 감독조차 장악하지 못한 탓인지 왜 이 인물이 맨홀 안을 들어갔다 나오는지도 설명이 안 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과거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연대의 가능성을 넓히다 “눈길”




가난하지만 씩씩한 종분(김향기)은 부잣집 막내딸에 공부도 잘하는 영애(김새론)가 마냥 부럽다. 일본으로 유학간다는 영애를 보고 자신도 가고 싶다고 엄마에게 떼를 쓸 정도다. 그러던 어느 날, 종분은 느닷없이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에 끌려가 열차에 내던져진다. 거기엔 일본으로 유학을 간 줄 알았던 영애도 있다. 함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게 된 종분과 영애. 끔찍한 현실 속에서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꿈꾼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살아남았던, 혹은 돌아올 수 없었던 소녀들에게 보내는 연서 같은 작품이다. 소녀들이 옆방에 있는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손짓은 애틋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눈길은 하염없이 길고 서럽다. 재현의 윤리에도 충실하다. <눈길>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비극을 물리적으로 전시하지 않는다. 그들이 당한 직접적인 폭력 장면은 배제되고, 은유적으로만 전달된다. 사려 깊은 만큼 극적인 재미도 있는 작품이다. 꿋꿋한 ‘캔디’ 종분과 고고한 ‘아가씨’ 영애라는, 전형적으로 대비되면서도 매력적인 두 소녀를 설정해 캐릭터의 재미를 주고, 두 소녀의 관계가 변화해가는 모습을 포착하며 관계성을 흥미롭게 파내려나간다. 여기서 올곧은 두눈을 가진 김향기와 목이 긴 사슴마냥 고고한 김새론은 배역 그 자체로 보인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세대를 확장해,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을 과거에만 한정시키지 않고 연대의 가능성을 넓히려 한 것도 의미 있는 시도다. 2015년 KBS에서 2부작 단막극으로 방영된 후 영화로 재편집돼 개봉하는 작품으로, <드라마 스페셜-연우의 여름> 등을 연출한 이나정 PD의 영화 입봉작이다.




<동네사람들> 여고생이 사라졌지만 너무나 평온한 시골의 한적한 마을



마동석과 김새론 주연으로, 복싱코치 기철(마동석)은 부당한 판정에 항의하다 제명당한 후 동생의 소개로 지방의 기간제 체육교사 자리를 얻는다. 제 몸 사리기 급급한 학교 선생들의 무관심 속에 학생들로부터 공납금 거두는 일을 맡은 기철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여고생이 실종되었는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유진(김새론)만이 실종된 친구 수연(신세휘)을 찾아나선 가운데, 기철과 사사건건 부딪치지만 이윽고 힘을 합친 두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수연의 흔적들이 지워지고 있음을 눈치챈다.

시작부터 끝까지 기시감의 연속이다. <동네사람들>은 그동안 한국 스릴러영화에서 수없이 차용된 소재와 상황, 해결방식을 총집합시킨 영화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악당에게 지배당하는 작은 마을에 정의로운 아웃사이더가 도착해 사건을 해결하고 홀연히 떠나는 구조는 큰 틀에서 서부극이 연상되는데 디테일은 지극히 한국(영화)적이다. 폐쇄적인 지방도시, 침묵하는 다수와 소외된 약자 등 한국 사회가 장르적으로 소비해 온 사회적 부조리를 옹기종기 뭉쳐 놓은 이 영화는 그래서 익숙하고 동시에 식상하다. 쉽게 예상 가능한 서사, 1차원적인 악역 캐릭터들은 극적 갈등은 물론 상황마저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마동석 캐릭터의 소모적인 반복이다. 여전히 유효하고 대체 불가능한 매력이 있지만 그 힘이 깎여나가는 게 확연히 보여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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