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그리움에게

강호동·김희선


외로움이 그리움에게



"다시 그리워지는 것 같군요.

“하루를 꼬박 당신이 자는 모습을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않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이렇게 등을 돌리고 있으니 다시 그리움이 쌓여만 갑니다.”

먹장구름에 가리웠던 초승달이 어둠의 장막을 밀면서 노오란 입술을 살포시 내미고, 구름이 사라진 동쪽 하늘에는 푸른 강가에 가을 산책 나온 별들이 하나 둘 영롱한 눈동자를 깜박 거리고 있다.

사락사락

수많은 날을 그리움으로 지세우게 했던 여인의 마음이 열리기라도 하듯이 어둠으로 덥힌 대지 위로 노오란 달빛을 토해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품속에서 잠드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서로의 마음을 지켜주는 따뜻함이야 말로 최고의 수면제가 아닐까?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상대방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늘 함께 하기를 간절하게 원하게 되고, 사랑하는 순간에는 함께 있어도 보고 싶어진다.

마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서로의 의미를 알 수 있는 마음의 일체감을 느끼는 순간의 행복이야 더이상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슴이 떨리고 심장이 콩닥거리는 자신을 들킬까봐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짜릿한 느낌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의 마법이다.

그녀가 웃으면 온 세상이 따라웃는 것 같고, 그녀가 슬퍼지면 온 세상이 비가 내린 것 같다.

내가 아는 세상은 그녀의 기준에 따라 흐렸다 맑았다 한다.

영원하리라 믿었던 그녀와의 사랑의 약속은, 사랑만으로는 모든 것이 충족될 수 없는, 마음만으로 사랑하던 그 시절은 그렇게 사라져 갔다.

팅팅 불은 라면 한 그릇과 식어 빠진 밥 한공기에 고추장 한 종지만 놓고 마주앉은 철다리 밥상마저도...

샤워도 하지 못한 채 땀에 절은 몸뚱이 일지라도 어깨에 기댄 머리카락에서 풍겨나오는 향기에 취해 버렸던...

캠퍼스 소나무길을 손을 마주 잡고 어둑어둑 해 질 때까지 말없이 걸어도, 마음속에는 무엇인가 모자람을 갈구했던 목마름에 안타까워 했었다.

늘 만나고 가까이 한 사람이 만나야 더 할 말이 많듯이, 사랑이란 인연으로 함께 머무면서도 더 보고싶어 했고, 잠시의 이별이 아쉬워 안타까워 했었다.

하지만 사랑의 크기만큼 서로에 대한 기대치가 더 커졌음을 우린 사랑하는 순간에는 몰랐던 것 같다.

늘 서로를 향한 시선이 서로에게 머물러 있었기에 그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

사랑의 달콤함에 빠져 사랑을 가꾸어 가야 함을 몰랐었다.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사랑의 방식이 필요 없다.

어떤 잘못과 행동을 하든 다 이해할 수 있고 사랑스럽게 보이기 마련이다.

뒤를 돌아보거나 후회를 고려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마음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와 말없이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보살펴 주는 것이야 말로 거짓 없는 사랑이다.

내가 한 사랑의 크기만큼 상대방에게 받기를 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사랑은 자신의 손해와 크기를 재지 않는다.

서로 같은 크기의 사랑을 원하면 부족한 사랑에 대해 항상 갈증을 느끼게 마련이고, 작은 무심함에도 섭섭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그런 것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리워지지만, 서로에 대해 익숙해 질 즈음에는 이별의 덫으로 작용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상처는 모르는 타인이 남긴 상처보다 더 크고 아픈 법이다.

시간이 약이란 말이 있다.

만일 사랑에 아파하고 괴로워 헤어질 위기에 있다면 잠시 더이상 다가가지 말고 서로가 냉각의 시간을 갖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순간의 질투와 오해로 평생동안 잊지 못하는 마음의 방황을 하지 않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져 다른 사랑을 맞이한다고 해도 처음 마음으로 사랑했던 사람 만큼은 못하다.

가슴에 잊어지지 않는 사람을 담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모든 것을 정리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자신이 자고 숨 쉬고 생활하는 동안 어느날엔가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리움과 보고픔은 환절기의 감기와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진심을 담은 사랑의 선택이었다면,

어떠한 난관이든 서로 신뢰의 끈을 놓지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절름발이가 아닌, 세상을 제대로 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아픔과 시련은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세상을 잘못된 눈으로 바라보게도 한다.

하나의 세상이란 정물를 바라봐도 각자가 그린 그림은 다 다르듯이,

장미꽃 가득 찬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라면, 다가온 사랑을 외면하지 말고 끝까지 극복하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만일 내게 또다시 사랑이 찾아와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희생해야 한다면, 난 서슴없이 그 길을 갈 것이다.





외로움에서 벗어나자



현대인치고 조금이라도 우울증 증세가 없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당연히 겪어야 하는 생노병사의 한가지라도 할 수 있다.

내가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 어디라도 갈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아마 이러한 증상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으로 살아가려면 배울 것과 볼 것도, 경험할 것도 너무 많고,

다양한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그것을 활용하면서 살기란 무척 어렵다.

왠지 거기에 따라가야 하는 마음의 조급증은 누구나 갖고 산다.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변화의 물결에 적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갖고 싶고 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마음속에 가득 욕망이란 찌꺼기를 키우기보다는, 가슴이 터질 듯한 사랑을 채우는 작업을 해야 한다.

사랑은 뜨거운 열망으로 타오르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소중한 무엇인가를 간직한 사람에게 있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곳 일 수밖에 없다.

우울증은 소중한 사람이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슬픔이나 비통과는 다른 감정이다.

무엇인가 특별한 원인 없이 마냥 슬픔이나 절망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삶에 대한 비관이나 자기 비하를 하는 행동을 한다.

일상생활에 흥미나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모든 일에 의욕도 없이 짜증스러워 한다.

밤에 깊이 잠들지 못하기에 일상은 늘 피곤하다.

열정과 활력이 사라진 자리에는 자신에 대한 비관만이 마음속에 침잠되어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에 있다.

심하면 정신치료나 약물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기에 가급적이면 자신의 능력에 대해 긍적적인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화가 났을 때는 참지 말고 화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참는 것이 남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자신에게는 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감정을 묻어두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가급적이면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부정적인 생각은 모든 일에 흥미를 떠러뜨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차 자신할 수 없어 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해 의문을 갖은 사람이 어떻게 다가오는 일을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도전하여 이길 수 있겠는가?

세상은 자신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그럴수록 머리 속으로 즐거운 생각을 떠올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말 사랑했던 지난날의 즐거운 추억을 떠올리거나 마음의 친구를 찾아 한없이 재갈거려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혼자 집안에 틀어박혀 쓸데없는 상상으로 자신이 만든 허상의 울에 갇혀 있기보다는,

도시를 벗어나 여행을 한다든가 아니면 가벼운 옷차림으로 공원이라도 산책하는 여유를 즐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시간들을 억지로 자려고 하지 말고,

가벼운 소설이나 아이들이 보는 만화라도 읽으며 기분을 전환하거나, 무언가 다른 일을 찾아 몰두하는 것도 좋다.

나이가 들수록 평소에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혼자라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히기 보다는 취미 생활을 즐기거나 등산을 한다거나 헬스에서 몸매를 가꾸는 것도 괜찮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이웃과 친구와 혹은 낯선사람과 자연스럽게 접하고 대화하다보면,

스스로가 만든 울안에서 자연스럽게 뛰쳐 나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누구나 항상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항상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못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비판적으로 볼 때는 한창 젊었을 때나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면 매사가 불만스럽게 인식되어 자신의 가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되는 것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말의 의미를 한번쯤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크게 손해날 일이 아니라면 가급적이면 마음이 시키는대로 행동하는 것도 좋으리라.

이제 그만 우울한 나에게서 벗어나 나만의 자유를 누리자.

일주일에 단 하루, 아니 한 달에 단 한시간이라도 마음이 시키는 자신만의 일을 하자.

내가 건강해야 내 가족과, 내 이웃과, 나로 인해 인연의 시슬로 맺어진 모든 사람들이 건강해짐을 기억하자. 





그리움을 찾는 여행



예전이나 지금이나 난 목적 없이 무작정 걷기를 좋아한다.

길을 걷다가 만나는 이름 모를 들꽃의 연약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라든가, 뒷동산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사춘기 시절의 사랑 이야기나, 이렇게 중년이 들어 지난 날을 회상하며 말없이 걷다가 들녘에서 만나는 황혼의 쓸쓸함이나, 땅거미 음영 짙게 드리운 거리를 헤 메이다 가로등의 불빛에 부딪치는 하루살이의 서러운 몸부림 같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멋도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이렇게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면 머리카락에 맺힌 빗방울 같은 실연의 아픔을 달래던  첫사랑 그리움이 생각난다.

하늘이 파랗게 아스라이 산 너머로 보일때에는 그저 어디론가 정처 없는 나그네가 되고 싶다.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던 학창시절로 돌아가 배냥 하나 어깨에 매고 기찻길이 끝없이 이어진 해안가를 따라 정처없이 걷고 싶다.

걷다가 힘들면 파도가 넘실거리고, 갈매기 낮게 나는 해안가 바위에 앉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연히 옹달샘이라도 만나면 목을 축이고, 허기를 달래던 찔레순의 텁텁함과 얼굴을 온통 찡그리게 하던 야생 시금치의 새콤한 맛에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던 길이라도, 마음 가득 추억을 담을 수 있는 호젓한 산길을 마냥 걷고 싶다.

풀대공 사이로 매뚜기와 여치가 재롱거리고,

메마른 가지에는 고추잠자리가 낮잠을 자고, 흰나비 노랑나비 함께 어우러져 사랑의 구애춤을 추는 햇 볕 가드한 숲 길과, 돌 틈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그 물 속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민물고기들의 즐거운 유영을 지켜보는 즐거움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아무 걱정 없이 미래만 향하던 여행을 떠나고 싶다.

여행은 환상을 지우는 작업이다.

여행 가이드나 여행지의 사진, 또는 TV 매체에서 보는 발리섬이나 나이가라 폭포는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이지만,  막상 가서 보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렌즈의 세상과 사람의 눈에 비쳐진 사물은 다르다.

뭐니뭐니 해도 사람의 눈 만한 것이 없음은 가까운 마을 동산에서 보는 풍경에서도 알 수 있다.

요즈음은 평생에 한 번이나 가 볼까하던 해외여행을 마치 이웃에 마실가듯이 갔다 온다.

비즈니스나 진정 무엇을 경험하고 배울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한 방편으로 여행을 간다.

예전에는 신혼여행으로 다녀오던 것이 이제는 미국이나 호주 그리고 중국이나 베트남 등 안 가는 곳 없이 한국 사람으로 넘쳐나고 있다.

여행은 좋은 경치와 문화유적을 직접 견학하는 것이겠지만, 진정한 여행은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경험해 보는 것이라 한다.

여행을 하면서 얻어지는 가장 큰 소득은 객관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편견과 아집이 엷어지고, 다른 사람의 의견과 견해를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 사람 사이의 갈등이 줄어들게 되고,

공동의 상황에서 서로 이해하고 협조할 수 있는 배려하는 마음을 알게 한다.

어쩌면 여행을 우리들의 삶에 비유하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사춘기 시절 한 여자의 사랑에 목메던 사랑의 열정이, 점차 결혼 적령기에 이르면 주변환경과 가족관계나 미래를 생각하고 갈등함에 따라 사랑보다는 현실을 찾는 것처럼, 여행은 세상을 욕심의 눈이 아니라 이성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여행은 이해관계가 없는 많은 사람과 만나 부담없이 대화하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갖을 수 있다.

다시 만나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전제가 붙어서인지는 몰라도 가식 없이 스스로의 본 모습을 드러내 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기에 의외로 사람의 본성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고난을 함께한 친구가 쉽게 잊지 않고 마음속에 남아있듯이,

여행이란 스스로의 삶이란 등짐을 지고 걷는 인생의 길이기도 하다.

청년일 때의 여행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전이라고 한다면, 중년의 여행은 지금껏 걸어온 길을 점검하여 다가 올 미래를 좀 더 굳건하게 다지기 위해 마음을 다가 듬는 결의의 시간이고, 노년의 여행은 자신의 걸어 온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때로는 혼자만의 여행을 할 필요가 있다.

이성과의 여행은 설레움을 주나 무엇인가 불편하게 하고, 가족간의 여행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하기에 고생이 뻔히 보이는 여행이라, 즐거워야 할 여행이 곧잘 최악의 상황으로 얼국 붉히고 돌아서는 여행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남의 눈을 의식하지않고 주변을 돌아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유롭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고, 가고 싶은면 가고, 머물고 싶으면 장소에 구애없이 언제든지 홀가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 최고의 행복은 자유다.

돈에서의 자유, 행동에서의 자유, 목적에서의 자유...

일상의 삶으로 규정 되어진 모든 굴레부터 벗어나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게 한다.

나이가 한 살 두 살 들어갈수록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워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고 어린 시절의 친구가 그리워진다.

무슨 말을 해도 혼쾌히 들어줄 것만 같은 마음의 친구와 같은 사람...

올 해는 이런 사람을 만나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언제나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어린 시절 추억을 같이했던 친구의 마음을 찾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김희선



사랑은 되돌아 갈 수 없다



“난 당신과 다시 만나면 당신과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줄 알았어요. 그동안 마음속의 그리움들이 자라 벅찬 감동을 받을 줄 알았어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의 가슴에 기대어 당신의 심장 소리를 듣고 싶었죠. 가만히 기대기만 하여도 충분히 내마음을 전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그리고 따사로운 햇볕이 새어드는 창가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당신의 얼굴만 한없이 바라보면서, 당신의 눈동자에서 전해지는 영혼의 말을 믿고 싶었죠.”

사랑이란 흔히 걸리는 감기처럼 누구나 한 번쯤 다가오는 이성에 대한 감정이다.

뜨거운 사랑의 기억을 간직한 삶도 있을 것이고, 가슴 쓰라린 별리의 아픔을 간직한 사랑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헤어진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다시 만난다면 그 당시의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아무 일 없듯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수많은 시간을 되돌아 만난 사람들...

예전처럼 마음을 열 수 있을까?

쉽게 말 하고 쉽게 다가설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보다도 더 힘들 것이다.

서로에 대한 성격이나 마음의 크기, 그리고 별리의 요인을 간직한 채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 간에 꺼릴 것 없는 솔로인 경우에도 쉽지 않은데, 가족과 가족이 합쳐야되는 상황이라면 예전의 사랑만으로는 힘들 것이다.

지금은 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던 그 모습이 아니고, 내가 사랑을 속삭이던 그 공간이 아니다.

이미 자신들의 옆자리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있고, 지켜야만 될 가족이란 인연이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이렇게 헤어지면 또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겠지만, 별리의 사랑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만나 환상을 지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보고 싶어하던 사람은 사랑했던 그 시절의 여자였음이다.

어찌 한순간도 떨어지기 싫어 골목길을 수도 없이 오고가던 그 여리고 순진했던 계집애가,

지금 어찌 같은 모습, 같은 느낌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하던 연인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헤어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런 착각 때문에 점차 사람들은 인스턴트 사랑에 익숙해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사랑이었든 반드시 일상의 흔적이 남게 마련이다.

핸드폰 속의 전화번호라든가 자주 걸었던 길이나 자주 가던 식당이나 찻집.

그리고 함께 사랑을 속삭이던 장소나 길가에 만들어진 허름한 벤치마저도 자신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에게 다가오는 마음속의 여운은 쉽게 잊지 않을 흔적들이다.

일기장 속의 이름이나 사진첩 속의 얼굴과 친한 친구들과 함께 했던 추억은, 그저 오래시간이 흘러 저절로 잊혀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인연으로 만나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였기에 이미 우린 숙명이 되어버린 것, 한번 맺은 사랑의 기억은 죽어서 재가 되어야만 살아질 것임에 틀림없다. 






자가당착 [自家撞着]은 삶의 또다른 모습이다



사람은 늘 자가당착 [自家撞着]에 빠져산다.

삶에 대한 가치관의 모순과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착각 때문이기에 자신의 능력으로 얻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랑 역시 이러한 감정의 착각에 의해 이성적으로 냉정과 절제를 하지 못하고, 감성적이며 열정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 같다.

슬픔이 크면 클수록 울음을 속으로 삼키고

기쁨이 지나치면 오히려 울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이런 모순을 갖는 속성이 있다.

인생 역시도 이런 속성을 지닌다.

자기가 좋아하는 표정을 바꾸고, 순리보다는 이익에 따라 자리를 옮기는 행동을 버젓히 하고서도 자기 합리화해 버린다.

내 몸에 난 상처는 아파 하지만 나로 인해 야기된 다른 사람의 상처에는 무관심하다.

상처 난 나무는 그 상처를 메울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하여 곱게 자란 나무보다 옹이가 배기고 상처투성이지만, 비바람에도 견딜 수 있도록 더 단단하고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는 사회라는 울타리는 인연의 뿌리에 얽히고설켜 돌아간다.

항상 만나고 어울리는 그 울타리의 사람과 어울려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행복과 기쁨을 얻지만, 또한 그런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고 마음 상하고 아파하게 된다.

상처 받을 때에는 다시는 안 만날 것처럼 화내고 헤어지지만, 또 그 사람으로 인해 위로 받게 된다.

싸우다 정든다는 말이 그래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학창시절 말썽꾸러기 아이가 더 그립고, 종아리 한 대 더 때려주시던 스승님이 더 보고파진다.

이러한 극과 극이 통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 아닌가 싶다.

사람은 누구나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태어나고 죽음에 이르는 것 또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동안의 삶의 방식은 온전히 자신의 몫인 것이다.

즉, 행복하게 살 것이냐?

불행하게 살 것이냐는 자신의 의지하에 놓여 있다.

누구나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의 마음에 닿지않으면 어느순간 행복했던 것들도 불행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아마 영원한 행복이나 영원한 불행은 존재하지 않다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 역시 그렇다.

다른 사람과 사는 평생의 시간보다 그대와 함께 있는 단 몇 분의 시간이 더 즐겁고 행복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이 네게 전달되지 않아 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랑은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친밀도로 느끼는 마음의 소리다.

평생 동안 단 한 사람만을 선택하여 죽도록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랑에도 우선 순위가 있게 마련이다.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한사람을 사랑하는 순간에도 다른사랑에 눈을 기웃하고,

죽을 것 같은 사랑을 했으면서도 채 상처가 낳기도 전에 또다른 사랑으로 가슴아파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들은 영원한 로맨스를 꿈꾸지만 사랑은 결국 유한한 것이다.

마음속에 갖고 있던 사랑에 대한 환상은 형식적인 사랑의 완성인 육체적 결합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점차 깨지게 된다.

영육이 합쳐지는 오르가즘보다 더 큰 환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있어도 보고파지고 그리워질 때는 바로 이러한 사랑의 순간이다.

지나친 행복은 사실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지만, 사랑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기에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시간은 결국 나비가 변태 하듯 사랑의 마음을 현실로 무참히 내팽개쳐 버린다.

그래서 가장 상처 주기 싫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주위의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되더라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삶의 선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아름다운 여자보다 예쁜 여자가 좋다



난 아름다운 여자보다는 예쁜 여자가 좋다.

아름답다는 것은 균형이 맞아 조화로운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고, 예쁘다는 말은 모양이 작거나 섬세하여 눈으로 보기에 좋은 현상을 표현하는 말로써 “예쁘다”가 표준어라,

가능하면 <예쁘다>로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한다.

하지만 <예쁘다>란 어감에서 풍기는 것은 아직 채 여물지 않은 풋풋함과 유아적이고 순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왠지 다가가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고 무엇인가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무엇인가 아직 덜 채워져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미성숙된 미소녀의 미를 표현하는 느낌이 강하다.

꽃에 비유하면 <아름답다>는 장미와 같이 정열적이고 강한 엑스터시(Ecstasy)를 느끼게 하고, <예쁘다>는 백합과 같이 수수하여 가녀린 느낌을 준다.

<예쁘다>는 아직 꽃망울을 피지 않은 순백의 미(美), 까무잡잡한 얼굴에 채 다듬어지지 않은 얼굴에서 바라보는 흑요색의 눈동자와 순박해 보이는 미소와 같은, 백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다>는 사랑의 감정이요, 이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간직한 소유적 느낌이 강하다면, <예쁘다>는 좋아하는 감정만이 흐르는 순수한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쁜 여자에게는 왠지 정이 간다.

성적 욕망과 이성에 대한 느낌보다는 그저 본능적으로 다가가게 되는 것 같다.

<아름답다>에는 어떤 까탈스러움과 경외감이 있어 쉽게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데, <예쁘다>란 느낌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

대게 누구나 다 인정하는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사귀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마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사람은 다 자기와 어울리는 사람과 사귀기를 원한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픔을 위로받고 싶은 자의적 욕망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어울리지 않는 도에 지나친 사람과의 인연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한다.

우리나라 속담에 <인물값 한다>란 말이 있다.

아름다운 사람은 늘 사람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있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자유롭지 못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주변 사람이 다같이 느끼는 미(美)가 아니라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미(美)다.

<아름답다>는 왠지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지만, <예쁘다>는 꾸밈없이 순수하다.

그래서인지 난 아름다운 여자보다는 예쁜 여자가 좋다.

디지털 시대인 요즈음은 대부분 TV에서 비추어지는 스타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란 속담처럼 너무 외모지상주의에 빠져 거리에는 인조인간들이 넘쳐나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든 몸매와 얼굴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피부와 머리카락, 그리고 가면무도회와 같은 짙은 화장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사람으로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주어진 일을 묵묵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땀 흘리며 가족을 위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바로 진정한 프로(pro)며, 세상을 가꾸는 아름다움의 전령사다.





끝이 없다, 시작만 있을 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꾸고 산다.

음과 양, 좋은 것과 나쁜 것, 기쁨과 슬픔, 그리고 악과 선 등등...

세상을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식속에 이러한 양면의 속성이 서로 균형을 맞춰 조화로워야 한다.

한쪽으로 지우치면 외면받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사회에 속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남게 되는 것 같다.

극악이 극선과 통하듯 사회는 항상 서로가 적당히 대비되어 채색되어야만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다.

행복이나 사랑 역시 이러한 반대되는 개념들을 극복해야만 얻어지는 것들이기에 소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세상에는 공짜로 거져 얻어지는 것은 없다.

로또 당첨과 같은 일확천금도 어느날 우연히 얻어지는 것 같지만 다 세상의 법칙에 의해 주어지는 행운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양면의 속성 중 중간자에 속한다.

그렇기에 항상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게 되고 갈등과 문제의 정도에 따라 고(苦)의 아픔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봐도 항상 선한자가 승리한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수만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란 말처럼,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천명을 받은자는 결코 선한자가 아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진리(법칙)는 적절한 악이 선속에 조화롭게 녹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개인이나 국가나 힘이 약하면 바로 이러힌 희생의 대상이 되기 쉽다.

스스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주장을 관철하고 싶으면 내 주장을 들어줄 만큼의 배경을 갖추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

자신의 그릇을 만들기에는 등한시하면서 위로 올라서려고 해서는 안된다.

어쩌다 아부나 재물을 써서 그 자리에 올라 선다 해도 오래 그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란 말도 있지만 능력에 맞지 않은 자리는 맞지않는 옷을 입은것과 같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위정자들은 항상 자기가 하면 로멘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란 인식이 행동중에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다.

그래서 차라리 근본적으로 악한것이 선한 행동뒤에 숨어있는 악보다 오히려 좋다.

그것은 이미 들어나 있어 스스로 조심하고 피하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포장되어진 악은 피하기 어렵다.

요즘의 보이스피싱이나 금융사기처럼 진실 뒤에 포장되어 사람의 심리를 유혹하는 것들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평상시는 매너 있고 친구들에게 현신적인 친구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손해가 가면 돌변하는 경우를 겪어봤을 것이다.

별것도 아닌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일인데도 뒷끝이 안좋게 나중에 어떤 방식이든 앙갚음을 하는 친구를 볼 때 얼마나 낭감한지,

아마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사람을 가려서 사귈 수만 있으면 좋겠지만 어디 인연이란 것이 마음 먹는대로 되는가?

그래서 사람은 알면 알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점점 알 수 없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창시절에 배운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은 그저 사람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 불과하다.

현대 인간의 표준형은 어쩌면 선과 악의 믹셔형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선한 것만이 미덕이 아니요, 옳지 않은 것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다.

착하게만 성장하여서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여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의 변화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믹셔형 인간으로 스스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약육강식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아이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아이들에게 돈과 지식을 물려주기보다는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어머니라도 했다.

죽음은 육신이 땅에 묻혀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죽음은 바로 스스로 의지로 육체를 움직일 수 없을 때이다.

스스로 의지가 살아있는 한, 자신을 한계지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의지가 있는 한 끝은 없다. 

시작만 있을 뿐이다.




사랑한 것은 내 자신이었을 뿐



그리움은 그 대상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 사랑을 나누면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은 진화하기 마련이다.

사랑의 감정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스란히 슬픔이 들어와 그리움으로 변해 버린다.

슬픔은 또 다른 사랑이다.

외로움이 그리움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 같은...

이별 당시에는 내게 아픔을 준 사람을 죽일 만큼 증오하고 원망하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동안 고통스럽지만 감미롭고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된다.

진정한 사랑을 한 사람은 원망은 하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서로 사랑하는 동안은 정말 서로에게 진실했으며, 몸과 마음과 서로에 대한 배려가 거짓 없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진실한 사랑은 헤어져 남남이 되었어도 결코 완전하게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부정할 수 없듯이 사랑 또한 내 삶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다만 지난 사랑을 기억하면 더 아프고 힘들까봐, 애써 망각이란 이름으로 체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움속의 첫사랑의 여자는 점순이든, 째보든 아니면 뚱보나 못생겼어도 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린듯한 눈썹과 동그란 눈망울, 오똑한 콧날과 붉은 입술, 갸름한 턱과 시원스러운 이마, 그리고 칠흑같은 긴머리.

어린아이일 때도, 늙어 노파가 되었을 때도, 또 병들어 앙상한 모습일 때도 있지만,

첫사랑의 여자는 항상 자신과 가장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리움은 그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사랑은 하나다.

사랑하는 동안에 다른 사랑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는 동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미 과거의 사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동안은 영원히 그대 곁에 머물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막상 함께 하는 동안이 길어지면 점차 서로에게 바라는 것들이 하나둘 늘어나도,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던 단점들이 커져만 간다.

아마 자신의 미래를 고려해서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일상 중에 갑자기 걸리는 감기와도 같이 불현듯 생기는 감정이다.

만일 예비할 수 있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선택되어지는 사랑보다는 내가 선택하는 사랑이었으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야 이왕 누구나 한번쯤 겪어야 하는 홍역같은 것이라면 스스로의 의지로 사랑을 해야, 나중에 이별의 아픔을 겪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감내하지 않겠는가?

첫사랑이 평생의 사랑으로 이어진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다.

살아가는데 이런저런 경험들이 쌓여 삶이 되는 것이지만, 사랑만큼은 결코 자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가두기보다는 관심과 배려로 모든것을 포용하는 것이 더 좋다.

감정이란 자주 다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지기 때문에, 나중에는 내 마음이 정말 그 사람을 간절히 원하고 사랑하는지조차 몰라 지나칠 수도 있음이다.

누구에게나 사랑은 소중하다.

때문에 헤어진 사랑 역시도 소중하다.

누구나 자신에게는 진실한 사랑이 오기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진실한 사랑을 주기에는 망설인다.

자신의 전부를 준 사랑이 깨어지면 그 상처가 스스로 감당 못 하리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어느 사이엔가 내 몸에 녹아 스스로의 삶이되었음을 잊지 말라.

무엇엔가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신과의 약속이며 다짐이다.

반 평생를 살아 왔지만 아직도 난 사랑을 모르겠다.

그저 여자에 대한 욕망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치장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자신을 멋진 남자로 포장하기 위해 나의 진솔한 감정을 숨기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나 자신이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의 진실된 사랑은 그 사람을 나 자신만큼 사랑한 뒤에야 얻어지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사랑은 끝나버린 뒤다.

하지만 내게 있어 사랑은, 오늘 힘들다고 지름길로 돌아갈 수 없는 마치 숙명처럼 평생을 벗해야 한다.




익숙한 것들



이젠 마음을 숨기고 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산책을 하다 아름답게 핀 들꽃을 봐도 감동이 없고,

물안개를 헤치며 기암괴석이 언뜻언뜻 보이는 자연의 신비로움을 만나도, 선뜻 감탄사를 내뱉지 못하리만치 감정을 숨기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도 당당하기 바라보면 안 되고

나이 차이가 나는 자식 같은 이성에게 조차 가벼운 농담이나 다독거림이 성희롱이 될 수 있고, 마음을 담아 얘기한 말이 변질되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못이 되어버리는 요즈음의 세태에선, 순수하고 착한 사람은 바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 진다.

나는 그림 속 세상에 형체 없이 존재하는 자화상이다.

나 스스로 의지로는 아무것도 못하고 화가의 손에 의해 형상화되는 추상화에 불과하다.

아니, 실제로는 존재하나 가족이나 지인들의 작은 말 한마디에도 쉽게 뜻을 접어야 하는 꿈속에 사는 허상과 같은 존재다.

젊은 날은 모든 것을 가지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노력했고, 스스로 열정이 지나쳐 다투고, 깨지고, 그렇게 부셔져도 스스로에게는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리고 작은 이익일지라도 그것을 위해서는 자존심마저 팔아버리는 초라한 군상으로 남겨졌다.

이제야 태생적 한계라는 것에 익숙하기도 하련만 아직도 그 한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우물 안 개구리는 그 우물 속에서는 행복할 지 모르지만, 우물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의 본모습조차 지키지 못하고 세상에 휩쓸리다가, 수구초심(首丘初心)처럼 늘 태어나고 자란곳을 되돌아보고 그리워 할 줄은 몰랐다.

나의 人生이 어느 날 일장춘몽(一場春夢)처럼 여행 뒤의 피로와도 같은 삶이 되어 있음을 잊고 살았다.

친구를 만나도, 지인을 만나도, 때로는 친척을 만나도 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있는 척, 아는 척, 많은 척, 가본 척, 그리고 친한 척...

뒤돌아서서 욕할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을 보이면 무슨 탈이라도 난 것처럼, 스스로를 감추는 것에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남의 사랑을 질투하고,

남이 잘되는 것에 배 아파하고, 남의 잘못을 꼬집기에는 익숙해도, 스스로 작은 허물에도 인색하기에 남을 용서하고 배려하는 것에는 낯설어한다.

그러면서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처럼

모두에게 대우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어린아이가 되었음을 모른다.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에 익숙해지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려는 노력도 없이, 자리와 작은 이익에만 연연하는 기성세대가 되었음을 잊고 살고 있다.

순수한 사랑을 외면하면서도 너무도 그 사랑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음을...

부모나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항상 가슴속에 담고 살고 있으면서도 혹여 다가가면 자신에게 손해가 날까란 두려움에 빠져 외면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외면하고 모른척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자신의 몫임에도 우선 피하고 보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난 지금 어디까지 걸어온 걸까?

또 앞으로 얼마나 걸어가야 하는 걸까?

앞으로 내 가치가 변하고 또 얼마나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사람을 잃어가면서 살게 될까?

이제 스스로 내게 익숙해진 거짓된 몸짓과, 거짓된 사랑과,

거짓된 행동으로부터 떨쳐 나와 나에게 부끄럽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내 인생의 영웅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내 인생의 영웅이어야 된다.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최면을 걸듯이 스스로가 의지를 다져야 한다.

때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스스로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으로 길을 가다가 뜻하지 않는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가치관과 자존심을 잃지 않으면 언제가에는 자신의 인생의 중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 최종의 의사결정권자임에는 틀림없다.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책임져야하고 자신만이 가야할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부모나 친구 혹은 선배의 조언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결혼상대자, 또는 인생의 목표에 대한 선택은 물론,

그 선택을 위해 육체와 마음을 이끌어 가는 것 역시 스스로가 아니면 안 된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자신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 같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의지가 없이는 결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한 발자국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스스로가 자신과의 승부에서 졌을 때 몸과 마음이 병에 들기 마련이다.

정신적 방황에 의해 우울증이나 스트레스와 같은 마음의 병이 생기는 것이다.

스스로 귀하게 여기고 사랑해야 남에게도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내 곁에 있으면 행복해 하고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고, 나란 나무의 뿌리가 튼튼하게 자라 열매를 달릴 수 있도록 스스로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한 삶의 목표들이 가족이란 또 다른 삶의 동반자를 만나면 각자의 삶의 가치에 대해 적절히 조화를 통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함께 평생을 다툼 없이 지내기는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을 열고 적절하게 상대방의 생활방식을 인정하고, 배려와 이해하는 마음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이 바로 대화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심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멀어진다는 것만큼 사람을 슬프게 하는 일은 없다.

내가 아무런 일도 않고 나아가지도 않은데 자기가 바라는 길로 갈수는 없다.

내가 걸어가야 새로운 볼거리와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인생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걸음을 걷기를 주저하지 말라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 나의 인생을 밝혀주는 등불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라.

매일 꿈을 꾸면서 그 꿈을 이루기에 주저한다면 항상 봄날의 개꿈에 불과할 뿐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아무리 허접한 꿈일지라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자신의 인생에서 주인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 스스로에게는 영원한 영웅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행복하는 연습을 하자



진실로 악한 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가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거짓과 악한 일을 저지르며 산다.

상대적인 차이겠지만 어떤 일이든지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요즈음 누구나 쉽게 접하는 컴퓨터 운용에도 숙련도나 활용능력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동일한 일을 함께하는 집단이나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상대적인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약육강식의 세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누구나 약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약자가 되는 사람도 없다.

내가 처한 주변 환경에 따라 약자가 되기도 강자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스스로 주어진 환경을 잘 이용하면 그 집단의 리더로 강자의 위치에 자리매김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처세술이다.

육체 능력의 우위에서, 지식의 정도에서, 기술의 능력이나 정보의 활용도에서, 또는 재산의 정도나 미추에서도 강자와 약자로 나뉘게 마련이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 것이 많은 사람이 곧 사회에서 강자의 지위를 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약자라고 해서 그저 눈물만 흘리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려야만 할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려서 고아가 되고, 배움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다고 해서 평생을 약자로 머물려만 하는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현실은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꿈이 있고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자신을 강자라고 여기며 살고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늘 상대방보다 조금이라도 덜 가지고 있다고 믿기에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간다.

그리고 행복이란 꼭 강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마음속에 있는 것이기에 스스로 만족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다.

물론 돈이나 지위, 혹은 명예가 높으면 행복을 얻을 기회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행복으로 귀결되어 지는 것은 아니다.

이젠 스스로 행복을 느끼는 연습을 하자.

 타인의 더 많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자.

스스로가 불행하다 느끼면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 모두가 불행하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스스로에게 만족한 삶을 산다는 최면을 걸자.

요즘 내 스스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주변의 사람 사는 모습을 보면 대게가 오십보백보다.

대표적인 비교 대상인 재산이 많다고 해서 걱정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못하다 하여 걱정거리를 껴안고 사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 건전하고 긍정적이고, 몸이 건강하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행복이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사람들은 각자 어떻게 인생을 살았는지 과정은 다를지 모르지만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것은 다 똑같다.

그러므로 너무 자신을 낮추거나 스스로의 나약함을 탓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찡그린 얼굴보다 웃음 머금은 얼굴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어차피 세상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면, 쓸데없는 일로 자신을 괴롭히고 우울해 하지 말고 평화로운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만큼은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곧고 훤하게 보이는 길이라도 막상 가다보면, 울퉁불퉁하고 굽거나 험난하고 좁아진 길이나 낭떠러지기에 위태롭게 난 길도 만나게 된다.

험하다고 해서 돌아간다고 해서 자신이 가는 길이 곧고 편안한 길이라고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미 길이 있고, 다른 사람의 발자취가 남아 있어도 내가 가지 않으면 그건 길이 아니다.

내가 걸었기에 길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경험하거나 눈으로 보지 않고 대충 그럴 것이다. 라고 말하지 말라.

아무리 선인들이 이미 경험하여 기록으로 남긴 길을 답습하여도 직접 그 길을 걸어가면서 느끼는 감정은 그 길을 걸어가는 시간과 풍경과 기분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똑같은 산을 수없이 올라도 산삼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은 사람은 따로 있다.

때문에 아무리 하찮고 보잘것없는 길일지라도 스스로 그 길을 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생의 길은 누구에게나 처음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좌절하기도 하고 고통과 외로움에 울기도 한다.

그렇다고 죽음으로 단절되지 않는 한 길을 가기를 멈출 수는 없다.

몸에 병이 들고 다리를 다쳐 불구자가 되어도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힘들고 지쳐도 머무를 수 없는 길이 바로 인생이란 길인 것이다.

어른을 한자로 成人이라 한다.

무엇인가를 이룬사람을 말한다.

그럼에도 요즈음은 진정한 어른이 없다고 한다.

모두가 이익만 탐하기에 아이들에게나 사회에도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것이다.

불의에 나서는 않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요, 적당히 잘못과 타협하고 사는 것이 마치 옳은 처세술처럼 살다가 그것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와서 까지 남을 원망하고 탓한다.

모두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모른다.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잘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지인의 어려움을 보살피는데 소홀히 하고 도움의 손길을 보태지 않았으면서 내 어려움을 남몰라 하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은 자신이 한 것만큼 스스로 주어진다. 

재산을 얻고 싶으면 남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명예를 얻고 싶으면 많은 사람에게 덕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름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스스로가 할 일이다.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 만나는 인연들을 항상 소중히 여기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 인연이 언제 다시 돌아와 인생의 등불이 되어줄지 모르는 일이다.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고 했다.

인연으로 만난 사람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은 가급적이면 삼가야 한다.

흔히 가까운 사람은 내 사람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혀 소홀히 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까운 사람일수록 늘 관심과 배려를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내가 걸어가는 구부러진 저 길목에서 무엇을 만날지 아무도 모른다.

반가운 인연과 만날지, 험난한 여정이 가로막혀 있는지, 아니면 이별의 아픔이 우두커니 남아있는지, 아! 내가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아있는 걸까?

굽고 휘어진 잘못된 여정을 바로잡을 기회라도 내게 주어질까?



강호동·김희선·강지환·거미·정용화

강호동·김희선·강지환·거미·정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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