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정이 왜 그리 중요한가

김희선



가을 산책




아침에 잠시 비가 온 뒤 화창한 봄 날씨에 모처럼 퇴근이 빨라 가벼운 기분으로 산책을 나갔다.

오늘은 하루종일 왠지 모를 답답한 마음에 빠져 있었기에 혼자 덩그라니 집안에 머무르기 싫어, 트레이닝으로 갈아입고 중랑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산책이라 해봤자 땅거미가 서서히 대지에 내려앉고, 호젓한 중란천인지라 별로 볼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는,  공원 길이 전부다.

멀리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붉은 태양 이외에는 그저 싸늘한 바람 마저 은근히 불어오고 있다.

바둑판처럼 이리저리 갈라진 갈림길이 나오자 나는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게 서성이는 동안에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 한 분이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 어르신을 따라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가다보니 평소 자신의 걸음걸이와 관계없이 어르신의 걸음걸이를 닮아가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쭉 걸어가야 할 길을, 어르신의 발걸음만 따라가다 보니 그저 어르신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갈 뿐이었다.

머리속에는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도 없이,

남들이 보기에는 함께 산책하는 동행자처럼, 같은 공간에서 가야할 방향도 정하지 않고 정처없이 30여분을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상쾌해지고 기분 마저 시원하게 확 뚫린 것 같다.

무엇 때문에 나의 마음이 답답했을까?

무엇 때문에 내가 어르신을 따라간 걸까?

마치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강아지가 주인을 따라가는 것처럼, 무아에 빠져들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내가 마치 자폐증에 걸린 사람처럼 내게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고민과 두려움에 빠져, 스스로 마음속에 가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나그네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도, 걸어가는 의미도 없이 그저 내가 살아온 과거의 흔적을 의지한 채 미래를 재단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요리를 만드는 사람에게 잘 드는 칼이 주어지면, 처음에는 날카로움에 절로 흥겹지만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 그 날카로움이 사라지면, 자신도 모르게 칼에 의존했기에 오히려 요리실력 향상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IQ가 높다고 하여 성적이 오르고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것도 아니며, 돈이 많다고 하여 마음마저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와 생각이나 행동을 자신의 의지하에 두느냐에 따라 불행도 행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은 자신의 마음 먹기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길이란 많은 사람들이 지나온 자취이며 과정이다. 때문에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발길이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험하고 두렵지만 언젠가 나 역시 내가 따라간 노인이 될 터인데, 나 역시 나의 걸음을 따라올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리라!

오늘도 땅 속 깊은 곳에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음을 잊지 말라!





그대여, 행복하기를



떠나는 나의 마지막 모습을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그것이 행운일까?

아니면 미안한 걸까?

함께 할 때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기에 나를 사랑한 모든 사람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의 입장에서는 행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떠난 사람이 무엇을 알겠느냐 만은 그래도 혼자 쓸쓸하게 이별을 맞이한다면 조금 처량하지 않을까 싶다.

헤어짐이라는 것, 빠르고 늦은 차이만 있을 뿐, 그 누구도 피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삶의 과정일 뿐인 것을...

나의 이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떠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자꾸만 가슴속을 뚫고 나오는 사랑에 대한 미련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함이 나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나는 결코 그녀에게서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다만 그녀가 나에게서 존재하는 것 보다 그 사람 곁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소설이나 유행가 가사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삶도 있다고 애써 자위하지만, 그래도 난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언제나 떳떳한 한 남자로 살기 위해 이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나와의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해서 나마저 그녀가 내 마음속에 삶을 거부할 수 없음이다.

내 인생은 나만의 것이듯 그녀와의 기억은 영원한 나만의 공간이다.

그녀 나새롬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설레게 했고, 기쁘게도 슬프게도 했던 이름이여!

그저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평생을 함께 하리라 수없이 다짐했던 그녀와 머물던 찻집이나 그녀의 집 한구석과 소나무 숲길...

어찌 나의 마음에는 눈물보다 행복했던 순간들로 넘쳐 나는데, 그녀가 나를 외면하였다 하여 원망이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새롬.

지금에서야 미안한 말이지만 난 사실 너를 나의 전부가 되리만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저 네가 해주는 음식이나 정성을 귀찮아했는지도 모른다.

늘 곁에 있는 것이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느꼈기에 네가 바라는 것, 네가 원하는 것조차 몰랐다.

그렇기에 너의 변화조차도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 네가 변해서야 나도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 정도로 무감각했다.

이런 내가 어찌 너의 사랑을 막을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 다가온 사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 비록 나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할 수 있다면,나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그녀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었기에, 난, 이렇게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걸어 갈 수밖에 없다.

곁으로 눈물을 흘릴지라도 그녀의 행복한 삶이 나의 목표였기에 진정 난 그녀의 행복을 빌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그녀의 곁을 떠남을 선택했기에 결코 후회나 아쉬움이 남지않다.

지금이나 먼 훗날에도 진정 행복하기를...




시간과 인생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인생에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즉. 살아가는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왜 살아가는지, 왜 살아야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에겐 시간이란 의미가 없다.

늘 같은 일상,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사람들, 같은 얼굴들...

하지만 특별한 꿈을 꾸지 않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어쩜 변하지 않는 이러한 일상들이 오히려 편안하고 소중하다.

사랑, 우정, 가족, 그리고 행복이나 기쁨이란 단어들...

영원히 변하지 않고 항상 곁에 남아 함께 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한다.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가능하다면 내가 슬펐던 시간은 빨리 흐르게 하고, 기뻤던 시간은 영원히 멈추게 하고 싶다.

흔히 성공한 사람은 똑같은 시간을 몇 배로 늘려서 쓸 줄 아는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조차 허송세월로 보낸 사람이다.

시간은 모두에게 성공의 단맛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출발점은 같아도 세월이 흐른 뒤에 보면 어떤 사람은 특출하게 성공가도를 가고 있고, 어떤 사람은 낙오자가 되어 인생을 허비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그 사람의 성패가 좌우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삶의 출발점이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얼마나 좋을까?

사람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관습이나 사고의 범위는 무의식적으로 가족이란 틀 속에서 연연히 계승되기 때문에, 눈을 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부모의 빈부의 차이나, 지식수준의 정도, 문화에 대한 관점에 따라 성장하면서 접하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공정한 출발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좋은 환경에서 많은 지원을 등에 업고 출발한 사람과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자수성가하는 사람의 인생은 그 차이를 쉽게 좁히기란 요원한 일일수도 있다.

사람의 의지에 따라 인생도 변하는 것이지만 의지와 노력만으로 좋은 조건으로 출발한 사람을 따라잡기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새로운 지식과 경험은 <나>란 자신의 몸을 통해 체득할 수밖에 없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문명의 이기와 다양한 문화의 콘덴츠(contents)를 습득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것들을 직접 접해봐야 하는데 따르는 제약조건들을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자기의 몸에 맞는 옷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여 자신의 몸에 맞게 재구성하여 사회에게 요구하는 인간상을 만드는 것이

현대를 사는 인생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자신과 어울리고 좋아하는 일에 대한 선택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만 인생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가 행복하고 만족하지 않다면 결코 자신의 삶을 살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F. 실러는 미래는 주저 없이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고 했다.

시간을 아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미리 앞질러 예비하는 자만이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다.

우리 모두 시간을 극복하는 승리자가 되기를 바란다.





가치 있는 이름



김춘수 詩人은 <꽃>이란 詩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했다.

이름은 누가 뭐라 해도 다른 사람이 불러주었을 때 빛이나는 것 같다.

가슴에 와 닿을 때까지 부르다 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정감이 들고는 한다.

이름은 그 사람의 명함이며 문패와도 같다.

살아있는 동안의 자신의 모습이고, 지켜가야 할 자존심이며 자긍심인 것이다.

살면서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속의 이름도 있고 평생 동안 가슴으로만 불러야 할 이름도 있다.

또 다른 사람 앞에서는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이름도 있고 가슴에 숱한 멍울만 남기고 간 원망스러운 이름도 있다.

평생 동안 고마움과 감사한 마음을 간직한 부모님이나 은사님의 함자도 있고, 마음으로 불러야 하는 첫사랑의 이름과 아픈 상처를 준 이별 속의 이름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누구의 어머니나 아내로 불리는 여성의 삶 속의 이름도 있고, 항상 남들로부터 존경받는 명예로운 이름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좋은 이름이란 남들이 부르기가 쉽고 편한 정감 있는 이름인 것 같다.

이름이 놀림의 대상이 되지 않고 남에게 기억되기 쉬운 이름이면 더할 나위 없다.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부분 그 집안의 돌림에 따라 지어지며, 흔히 오행을 기준으로 삼는다.

아기가 태어나면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짓기도 하고,

무병장수하고 복을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작명소나 점집에서 비싼 돈을 들여 짓기도 한다.

주로 아이는 집안의 어른이나 부모에 의해 이름이 결정되는데, 이름마다에는 다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아들을 낳기를 기원하여 여자아이의 이름을 남성스럽게 짓기도 하고, 그만 낳고 싶어 끝순이란 이름을 짓기도 했으며, 왜정시대에는 여자아이의 이름이 子로 끝나는 사람이 많았고, 90년대에는 예쁜 한글이름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름은 역사성을 갖고 시대의 흐름과 문화를 반영하기도 한다.

또한 그 사람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미리 알 수 있다하여 매우 중요시 했다.

때문에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호적상 이름이 다르고, 별명이나 자(字)나 호(號)등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많다.

어릴 때 부르던 이름을 아명(兒名)이라 하고, 호적에 올라있는 이름을 관명이라 하는데, 이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며, 성인이 되어 관례를 치르면 집안어른이 이름 대신 를 지어주는데, 자(字)는 주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서 불려졌다.

호(號)는 학문이나 예술 등 그 지방이나 나라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으며 대부분 스스로가 작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호(號)는 존칭이 붙지만 자(字)는 존칭이 붙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의지는 힘을 불러오고 그 의지를 불러오는 가장 훌륭한 매개체는 말이며, 그 의지가 가장 잘 형상화된 것이 이름이다.

때문에 자신의 이름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곧 자신에 대한 자존심이며, 삶의 지향점인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잊혀지지 않고 기억된다면 자기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할 것이다.




홀로 서는 법



참스승은 혼자 걸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람이다.

사람이 사회라는 정글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깝지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나 스승에게서 배운다.

이미 먼저 인생의 길을 걸었던 사람에게서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위험요소를 피해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방법을 습득하는 것이다.

어디에 위험이 있는지, 어디로 가면 안되는지, 왜 안되는지 자신만의 판단이나 이유도 모르면서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취를 답습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은 철저하게 혼자만의 길이다.

처음에는 믿음을 갖고 따라가지만, 스스로의 의지가 생기고 가치관과 시대의 환경에 따라 자신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순간 부터 갈등과 모순이라는 벽을 만나게 되고,

스스로의 목표와 꿈에 대한 재정립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스승에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을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가치에 맞게 수정하고 보완하여 몸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비로서 자신의 인생이 되는 것이다.

고통과 좌절의 과정을 통해 눈물을 흘려도 보고, 절박한 번뇌와 고민을 이겨내야 비로서 살아있는 지식과 경험이 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내가 인생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인생은 나이에 따라 단계, 즉 과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혹여 단계를 생략하고 넘어가도 언젠가는 그로 인한 시련을 반드시 거치게 마련이다.

분수에 맞지 않으면 그로 인해 자신마저 잃을 수 있음이다.

분수에 맞게 자신의 한계치를 정하여만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이나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었을때 "아빠, 감사합니다."란 작은 말 한마디에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지 않는가?

스스로 인생에 의지를 부여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만이 자신의 인생이 된다고 난 믿는다.

가급적이면 인생의 목표를, 좋아하는 일과 매치되는 방향으로 정하기를 권하고 싶다.

누가 뭐라해도 자신이 하는일을 즐겁게 할 수 있어야 행복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하면서 즐겁고 행복하지 않다면 인생에 무슨 의미를 있을까?

강을 건너는 방법은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헤엄쳐 건너는 사람도 있고,

배를 타고 건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뗏목을 만들어 타고 건너거나 잠수를 한 채 건널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건넌 사람의 방법을 참고는 해야 하겠지만 그 사람의 방식을 답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강을 건너는데 소요시간이 짧은 사람도 있고 긴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강을 건너는데 타인의 강요나 억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해야 하며, 가급적이면 긍정적인 생각과 즐거움을 동반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일에 만족한 상태로 목표에 도달해야 후회스럽지 않다.

자신이 이룰려고 하는 목표에 친구나 스승, 혹은 가족이 함께 서로 상부상조하여 달려가지만, 최종적으로 그 목표에 가치를 부여하고 성공 여부에 대한 판단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은 앞만 보고 달렸기에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냐에 대한 판다는 전적으로 타인의 몫이다.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해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없다.

어려움에 처하면 자신만 힘든 것 같지만 뒤를 돌아보면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다.

가끔은 앞서 가는 사람의 뒷모습만 보지말고 이따금 마음의 여유를 갖고, 나비의 유충이 변태를 하여야만 화려한 삶을 살아가듯이 스스로의 껍데기를 벗어던질 필요가 있다.

너무 한가지 일에 치중하면 사람 냄새가 나지 않고 인정머리 없다란 말을 듣는다.

완벽한 사람보다 조금 어리숙하고 빈틈을 보이는 사람이 더 정감이 가고, 이런사람이 친구가 많다.

스스로를 낮추고 타인과 눈 높이를 맞추는 것,

내가 부족한 부분, 안가진 부분을 스스로 인정해야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타인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난 성공한 사람보다는 주어진 삶을 즐겁게 살아간다란 소리를 듣고 싶다.

내 등 뒤에서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보다

항상 나에게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주는 친구와 가족의 따뜻함을 더 감사해 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사람이 사는 이유



사람은 평생동안 이익을 추구하며 산다.

이익 없이는 행동 역시 없다는 말과 같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란 말처럼, 이익을 탐하면 속물이라 할 수 있지만, 공짜로 밥이나 차 한잔을 얻어 먹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듯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형제나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일에는 인색한 것이다.

그렇기에 평소에 친구나 아는 사람으로 부터 받은 도움은 쉽게 잊고 자신이 도와준 사실만 기억하다 보니, 어쩌다 손해가 가는 일을 저지르면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화를 내거나 외면하여, 서로의 사이를 갈라놓거나 심하면 원수지간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럴때면 타인을 탓하기 전에 스스로 잘못이 없나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데, 타인의 잘못만 탓하기에 이해가 안되고 잘못의 부피는 점점 커져가는 것이다.

사실 친한 사람과의 갈등과 불화의 원인은 누가뭐라 해도 본인에게 있다.

화를 삭히고 나면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쉽게 사과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이기고 먼저 사과하는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남자며, 용기있는 행동이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재물이나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재물은 조금만 노력하면 먹고 살 정도는 쉽게 모울 수 있다.

물론 큰 부자는 하늘이 도와야하지만, 스스로 삶을 영위할 정도는 부지런만 하면 굶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 했다.

재물은 항상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기에 쉽게 사람을 배반하고, 사람을 시험에 들게도 하고 사람과의 사이를 갈라놓는 요물과도 같다.

돈을 모은다는 것은 들어오는 것은 많게 하고 나가는 것을 적게 하는 것이다.

자기의 분수에 맞지않게 적은 수입이면서 흥청망청 분위기에 따라 살면 결국 쪽박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기에,  분수를 지킬 수 있는 자기절제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재물이 있으면 명예나 권력도 살 수 있지만 그것도 자신의 자질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모래위의 성과 같다.

둘째로 명예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그사람의 품위나 지위를 말한다.

따라서 명예는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아무리 노력한다고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지식이나 경험들이 쌓여 얻어진 그 사람의 품성이나 소양, 사회적 지위나 생활방식 또는 집안의 혈통에 의해 자연스럽게 얻어져야지 인위적으로 조작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노력에 의한  만들어지는 것이 명예며, 주변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바로 명예인 것이다.

셋째로, 권력은 남을 지배하는 힘을 말한다.

남 위에 군림하는 이런 매력 때문에 남자라면 한 번 권력의 정점에 서고 싶은 것이다.

지금은 머슴으로 국민의 뜻을 받들어 집행하고 통합하고 분배하는 조정자며 관리자인 대통령으로 지칭되지만 예전만 해도 무소불위의 힘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잘만 사용하면 세상을 이롭게도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지탄과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권력을 얻으면 명예나 재물은 자연스럽게 그냥 따라오는 것이기에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도전으로 부터 견뎌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사는냐는 다 각자의 몫이다.

돈이 될 수도 있고, 명예도 될 수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람이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사람이 있어야 사용할 수 있으며 사람으로 인해 유지되는 것이기에, 인간성을 지키는 한도 내에서 이루어져한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관심과 애착




사람은 자고 일어나 눈을 뜨고 활동하는 순간부터,

오감을 다해 삶을 느끼고 경험하면서 미래의 발전을 도모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고 배운 지식과 주어진 환경이 다르기에, 각자 삶을 바라보고 느끼는 것도, 삶에 대한 관심과 애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첫째로, 주어진 것을 그대로 만족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한 곳에 안주하려는 습성이 짙게 배어있어 지극히 수동적이며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미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주어지는 기회 조차 날려버리기 일쑤이다.

두 번째로, 주어진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 새로운 발상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사람이다.

문제의식이 있고 주어진 환경을 개선하려는 행동과 분별력은 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이나 실천하려는 의지가 결여된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실상을 파악하고 올바로 추진할 수 있도록, 진취적인 자세로 최선의 대안을 마련하고 창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각자의 인생은, 자신의 주어진 삶에 대하여 얼마나 관심과 애칙을 갖고 임하는에 따라 많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관심이란 삶의 모든 요소에 강한 의미로 접근하고자 할 때 얻어지는 것이다.

또한 애착이 없으면 실천하려는 의지가 결여되기 십상이다.

관심을 통해 애착을 가져야만 적절하고 구체적인 해답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일에 관심이 없다면 그 인생은 한마디로 죽은 인생이다.

일에 대한 의욕이 있어야 그것을 해 내려는 애착이 생길 수 있고, 애착이 있어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거기에 다가가지 않고 말로만, 뜻으로만 얻어지는 것은 없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한다고 해서 다 자신의 지식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아는 것을 여러번 되새김질하여 자신의 삶에 접속시킬 때 비로소 자신의 삶도 빛이 나는 것이다.

관심과 애착이 없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마저 토막토막 단절되고 만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데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외톨이로, 국외자로, 이방인으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주도해야 비로서 삶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한 번 남에게 이끌려 수동적인 길로 접어들면 얼마 동안은 헤어나지 못해 인생을 낭비해야 함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하고 부채를 안게 되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출 수밖에 없음이다.

관심과 애착이야 말로 삶의 활력소이며, 생명수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자신의 인생에 밑거름을 주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이요, 관심이다.




산에 오르는 인생



인생은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처음 산행을 시작하면 땀이 나고 몸이 어느정도 풀릴 때까지는 숨이 차고 다리도 아프고 몹시 힘이 든다.

그렇다고 한걸음에 올라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걸음 한걸음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올라가야 한다.

가다보면 경사진 비탈길도 만나게 되고, 모래가 깔린 미끄럽고 위험한 길, 돌부리와 나무뿌리가 뒤엉킨 험난한 여정을 만나기도 한다.

쭉 뻗은 평단한 길도 있고, 곧은 길이나 굽이굽이 휘돌아 가면서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며 가야할 때도 있다.

계단을 오를 때, 한 두 계단은 성큼 올라갈 수 있지만 한꺼번에 여러개의 계단을 오를 수 없는 것 처럼,

급하다고 주변을 튼튼히 하지않고 빨리 오르면 그만큼 빨리 내려와야 하는 것이 정한 이치다.

인생 역시 처음 산행을 시작할 때 처럼 워밍업을 충분히 해둬야 순탄하게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는 바로 학창시절을 의미한다.

주변을 돌아보고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키우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잘못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도전하여 새로운 경험을 쌓야야 한다.

그래야만 인생을 되돌아 보고 실패를 두려워 하는 나이인 중년이 되었을 때 자신만의 아성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지나온 과거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경험담이지만, 실패한 사람에게는 처절한 후회만 남기게 된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 했다.

반면교사란  반대되는 쪽이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 등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도리어 가르침을 얻을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즉, 사는 동안 성공과 실패에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들을 스승으로 삼아

자신이 가고자 하는 삶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윤활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틈틈이 자신의 삶에 대해 반추하고 되색임하여야 한다.

실패에 머물러 좌절하고 후회만 하여서는 자신의 삶에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

사람이란 오묘한 존재여서 고통스러운 경험이든 아니든지 금방 몸과 머리에 익숙해져 버린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배신이나 죽음과 같은 현실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몸과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학습의 효과 때문에 선생님이나 부모의 강제에 의한 주입식 교육이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이우려는 의지보다는 항상 그것을 거부하려는 반대적인 측면이 강한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늘 갈등과 번민으로 갈팡질팡하게 된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을 갖을 수 있다면, 작은 기쁨에 행복해 하고 또 그것으로 충분히 삶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다.

홀로 올라가야 하며 오로지 혼자만의 힘으로 내려와야 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

삶 역시 그렇다.

친구나 스승이나 가족에 의해 어느 정도는 보호되고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지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살 것인가는 오로지 혼자의 몫이다.

죽는 순간 남의 도움을 받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혼자만의 힘으로 산에 오르듯이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 역시도 스스로의 의지로 정한 길을 갈 수 있도록 해야 하리라.


김희선



인생은 다짐의 연속이다.



세상에 테어나서 사람은 사고의 능력을 갖기 시작하고,

자신의 의지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성인이 되고부터,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 한 번 안해 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떤 목표로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

삶에 대한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사람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은 돈과 사회적 지위는 어느정도여야 만족스러운지...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와 행동방식에 대한 고민과 다짐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늘 마음속에 좌우명처럼 각인시키려 하지만 시간은 항상 망각의 속성과 나태함을 품고 있기에 그러한 생각은 연속성을 갖지 않는다.

어제 동여맨 마음의 끈이 오늘은 허물어지기 쉽고, 내일은 더욱 풀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있듯이, 마음속 다짐은 늘 잊혀진 존재로 내버려진다.

돈이 부족하면 돈에 대해, 몸이 아프면 건강에 대해, 이별의 아픔 뒤에는 사람하는 사람에 대해...

사람은 자신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다짐을 하고는 한다.

사람은 내일 당장 죽음에 이르러도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마음의 끈을 여며야 하듯, 하루도 쉬지 않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해도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러한 이치를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려 들지 않는다.

다짐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까다로운 조건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해야 하고,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돈을 벌 수 있는 직장이나 사업체가 있어야 하고, 건강을 얻기 위해서는 행동과 시간을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의 의지가 따라야 한다.

마음의 여유를 찾고 취미와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다 자신의 인생을 보다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남보다 조금은 행복하고, 남보다 조금은 여유롭고, 남보다 조금은 가진 것이 많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만일 오늘 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남과 비교하여 한가지라도 비교우위에 있는 것이 없다면 생각을 바꿔라.

그래도 없다면 생각만이라도 우위에 있다고 믿어라.

그래야만 최소한 행복할 준비가 된 것이다.

타인이 어떤 생각, 어떤 마음으로 살 든,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속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음이다.

다짐을 반복하고 생각을 긍정적으로 갖는 것은 오늘이 지나면, 시간이 흐르면, 미래에는 나도 행복하리라는 희망과 꿈이 있기 때문이다.

아주 만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보통은 될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채근담>에 이르기를 “사람이 몸에 병이 있는 것은 부끄러워할 것이 못 되나, 일생동안 마음의 걱정이 없는 것이 바로 걱정이다.”라고 했다.

즉 걱정이 있어야 그것을 이기기 위한 노력과 분발을 통해 삶의 새로운 활력과 의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인생의 추진력과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때로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고통의 시간이 오기도 하지만, 이를 극복하면 새로운 삶을 열게 되는 계기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사람이 감당 못 할 시련은 없다.

다만 몸의 고통이 힘든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이 더 괴로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는 걱정 중 70%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한다.

따라서 쓸테없는 걱정으로 심력을 소비하고 시간을 허비하거나, 스트레스를 받고 좌절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대부분 걱정이란 자신감의 상실에서 오는 것이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예견하여 하는 것이기에, 마음 속 다짐이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젊었을 때는 희망이란 놈이 늘 가까이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멀어짐을 점점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별 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내고, 슬퍼하며, 외로움을 타게 된다.

그리고 마음속 다짐의 횟수도 점차 줄어들게 되는 것 같다.

그만큼, 삶을 아는 것 만큼, 미래에 대한 희망의 기대 수치가 감소되는 것이리라.

어쨌든, 이러한 다짐이 행동을 통해 실천으로 나타나고 남에게 인정을 받았을 때, 비로서 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이다.




정상을 향한 꿈


사람만큼 만족을 모르는 동물도 없을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목표를 가지고 산다.

명확하게 목표를 정하고 사는 사람도 있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떠어떠하게 살고 싶다.”란 희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 목표에 도달하면 만족하기보다는 또 다른 목표를 만들어 아등바등 하며 산다.

어쩜 평생 그렇게 어떤 꿈을 향해 발버둥 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동안 살아 온 자신의 인생이 덧 없었음을 한탄하게 되는것 같다.

그렇게 발버둥 치면서 얻은 것인데 어찌 쉽게 그것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양심과 진실을 속이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인가 보다.

투자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정상의 달콤한 맛을 맛 본 사람은 결코 그 맛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정상은 쉽게 정복되는 것도 아니지만 정복되더라도 끊임없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성공해서 정상의 위치에 섰을 때 그 정상을 내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잠시 내가 머무는 자리라 생각해야 자리에 대한 강박감없이 더 높은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내 것이란 욕심을 가지면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에 인색하게 되고, 그 정상을 수성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결국 자신의 결점으로 돌아와 정상의 자리마저 위태롭게 되는 것은 물론, 그동안 숟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려 만들어 놓은 기반마저 잃게 된다.

한번 떨어진 절망의 나락을 헤쳐 다시 도전의 자리에 서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물론 사람들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비참함이 싫어 어떤 일에 도전하려는 용기를 갖는 것이 쉽지 않지만,

남자는 이런 야망이 있기에 삶의 의욕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일정한 사이클은 갖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라는 말 처럼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태어나서 자라고 죽음이란 소멸의 단계로 가는 과정은 같다.

성공 역시 그렇다.

성공이란 결국 타인과의 비교에 의해 자신이 만족하는 순간일 것이다.

마음의 만족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이요,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남들로 부터 인정을 받는 자리라 하더라도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건 결국 진정한 의미의 정상이라 할 수 없다.

사람에게는 추구하는 목표가 수없이 많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스스로가 인정하는 위치에 도달하면, 최상을 아니더라도 자신의 가치를 더욱 탄탄하게 만드는데 노력해야 한다.

기초가 튼튼한 집이 무너지지 않음은 정한 이치인 것처럼, 현재의 자리를 굳건히 해야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도약할 수 있는 텃밭을 만들 수 있다.

지금 자리에 정체되어 있다면, 정체되어 있는 순간을 탓하지 말고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한 도약의 기회로 삼는 지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정상을 향해 도전하라.

도전하는 순간은 모든 고통을 이기고 새로운 삶을 꿈 꿀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 꿈이란 바로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을 만드는 지름길인 것이다.

도전하는 그 자체를 꿈으로, 성공으로,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바로 이것이 만족을 아는 진정한 삶이라 말하고 싶다.




가족이란 질서



젊은 날 사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사라진 요즘 중년의 부부는 부부전선에 이상이 없는 부부는 아마 얼마 없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눈이나 자식 보기가 뭐해서 그렇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깨가 쏟아지게 사는 부부가 과연 얼마나 될까?

늙어 갈수록 부부라면 최소한 잠자리는 따로 쓰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아마 50% 이상은 따로 이불을 덥고 잘 것이다.

한 이불을 덥고 자야 육체적인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서로 심장의 소리를 들어야 성적인 충동도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성격차이나 의견이 달라 심하게 싸워도 다음날이면 아무일 없듯이 애정을 과시했던 부부도,  자존심을 극복하지 못하고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게 되는 현상은 나이가 들수록 더 하다.

이해하기 보다는 “네가 그렇게 하는데 나라고는 못 할까.”란 쓸데없이 고집만 세우게 된다.

지금은 여성 상위시대다.

부부싸움을 해도 먼저 몸을 사리는 것도 남자요, 가정의 주요한 의사결정에서도 대부분 여자가 우위에 선다.

남자는 상대적으로 육체적인 힘이나 가부장적인 문화적 측면에서는 우위에 있지만, 정상적인 부부라면 결코 우위에 서지 못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이미 아내에게 모든 권한이 넘어간지 오래다.

남편은 가족을 위해 죽도록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지만 그 댓가로 받는 보수는 고스란히 통장으로 입금되고,

가계의 살림을 맡은 아내에게 넘어간 통장의 돈은 다시는 남편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상사나 부하에게 식사라도 한 끼 사거나 친목적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도 아내에게 용돈을 타서 써야 된다.

남자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빠져 살기에 자신이 번 돈 임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 남자다.

경제 사회에서는 돈을 가진 사람이 곧 왕이며 권력자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상대방 몰래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숨박꼭질 하는 것이다.

여자 역시 자녀들의 교육비를 덜어준다는 핑계로 부업을 통해 돈을 버는 이유는, 

생계에 보탬이 되는 측면도 있지만 결국 자신이 벌은 돈으로 떳떳하게 쓰고 싶은 것 아니겠는가?

여권신장을 통해 사회적으로도 전문여성이 많이 늘어나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일이나,

호주제 폐지등 법적 제도적 차별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장인장모를 부양하는 등 문화적 측면에서도 많이 발전했다.

결혼하였다 해도 대부분 능력에 따라 일을 할 수 있고,

특히 아내는 가사의 전담자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전문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마 요즘 신세대 부부생활에서 남편이 아내의 가사 일을 분담하지 않는다면 아마 쫒겨나기 십상일 것이다.

출산이나 양육에 있어서도 서로의 일을 분담하고, 각자의 프리이버시와 일의 특성을 고려하여 일정부분의 일을 함께 하는 동반자로서 서로의 삶의 도우미가 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돈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심지어 사랑이라는 감정적 성공을 위해서도 돈이 필요하다.

돈이 많다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사회적 우위에 설 수 있다는 말과 동일하고, 교육의 기회나 경험이나 지식을 얻는데도 우위에 설 수 있는 성공의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돈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자기를 합리화 하기위해 <사는데 필요할 정도의 돈만 있어도 된다.>라고 하지만, 과연 사는데 필요한 돈의 한계를 어떻게 구분지을 것인가.

결론은 돈이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날이 갈수록 가족이 다 잠들고 난 다음 문득 잠에서 깨어나 더 이상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진다.

눈은 감고 있지만 머리는 깨어있는 것이다.

온갖 쓸데없는 생각과 상상이 머리 속을 어지럽게 한다.

“나이가 들수록 새벽잠이 없다.”란 말이 이래서 생겨났나 보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할수만 있다면 스스로 할 도리는 다했다 싶을 때 자신의 의지에 의해 생을 접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사실 난 권위적인 남편이나 아빠는 되고 싶지 않지만, 가부장적인 전통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질서(秩序)라고 생각한다.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말처럼 아이가 어른을 공경하고 따라야 사회의 질서가 바로설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서가 바로 서야 우리의 미풍양속인 효(孝) 사상이 바로 서게 된다.

아마 스스로 자신의 자식에게 버림 받을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정말 먼저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될 것이다.

사회에 기여한 사람이 존경받고, 부모가 아이에게 대접받아야 행복한 우리 모두의 가정이 될 것이라 믿는다.

돈이 조금 없어도 가족의 정으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아름다운 가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 우리의 엄마 아빠가 불면으로 밤을 세우지 않고, 어려움을 함께 이야기 하고, 가족의 어려움을 분담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란 울타리가 생기기를 기대해 본다.




가정이 중요한 이유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정이 왜 그리 중요한가?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에로스적 사랑이든, 아가페나 필리아적 사랑이든, 내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아니면 배려와 같은 우정이든, 스스로의 삶의 가치를 간직한 보물 창고와 같은 곳이 바로 가정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가족은 바로 정신, 즉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곳이다.

힘들면 언제든지 찾아가 편히 쉴 수 있는 휴식공간과도 같은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해야 할 일을 미루면, 또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만 누구에게나 사랑이 넘치고 편안히 머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내가 할 일을 스스로 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사랑하느냐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구성된 부모와 자신과의 가치보다는 항상 자신의 선택에 의해 구성된 가족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스스로의 사랑의 약속같은 것이다.

그러하기에 내리사랑이라는 이름의 희생이 더욱더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는 이러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인연들을 지켜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이혼하는 가정이 넘쳐난다.

황혼 이혼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쉽게 갈라선다.

늙어서 서로에게 짐으로 남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불쌍하고 처량한 일이 아니가?

물론 사랑의 깊이가 크지않아 생기는 현상이지만, 스스로가 선택한 사랑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여건이나 성격차이든 다양한 이혼의 요인이 있겠지만, 사랑의 가치가 그만큼 낮아진 것이 가장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낳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육체적 언어와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지만, 서로의 마음에 각인될 정도의 진심이 결여된 거짓 사랑이었을 뿐이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보다는, 사랑을 지키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리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대부분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요인을 살펴보면, 자신이 손해를 보고 있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남의 탓만 하지 자신의 잘못으로 헤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어느 순간 아내에게,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이 희생한다는 관념에 사로 잡혀, 그동안 얼마나 서로를 절실히 원하고 사랑해 왔는지를 망각해 버린다.

그 당시는 감정이 격해 인정하려 들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신이 원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헤어지면 당장은 자유로울런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적당히 구속했을 때가 가장 행복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왜 조금 참지 못했을까?  내가 왜 그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만을 내세웠을까?

무엇을 지켜간다는 것은 어느정도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족 한 사람의 일방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가 조금씩 내놓은 희생과 관심, 그리고 사랑이란 공통분모가 모였을 때 비로서 가정이 지켜지는 것이다.

사랑은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많아야 아름답듯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가족에게는 틀에 박힌 인사치레나 자질구레한 격식 따위는 필요없다.

한 줄기 미소만으로도, 마주 바라보는 고요한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에겐 말이란 오히려 자신을 숨기기 위한 연막일 뿐이다.

진실한 가족의 사랑은 절대적 신뢰와 믿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령혼™

단상·칼럼·포토에세이·저널리스트 김진철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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