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인생은 정답이 없다 한다.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정의는 어쩌면 말장난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평생을 보내고 죽음 앞에 서서 지난 삶을 말한들 그 삶은 그저 그 사람의 인생일 뿐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생각이나 가치관, 혹은 의미가 다르고, 주어진 시간 속에서 느끼는 경험치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의 말을 들어도 다른 의미가 되는 것처럼 사람은 저 홀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늘 변하는 존재라고 한다. 

하루라는 일상이 더해져 그 사람의 인생이 만들어지지만, 우린 정작 하루라는 그 일상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아마 그동안 요리조리 하기 싫다고 피하고, 어렵다 피하고,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피하고, 현실이란 이름 앞에서 늘 무릎 꿇고 살았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처음에는 자존심이 상하고 낯도 뜨거웠지만, 반복되는 순간 언제부터인가 마치 습관처럼 익숙해졌을 것이다. 

이렇듯 하루하루 난 삶의 의미를 지우고 있다. 

이중적이고 간사스러운 마음으로 마치 봄 날씨처럼 변화무쌍해 스스로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될 사람인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버럭 성을 내고서는 후회와 용서를 비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실수라 믿기에는 스스로 용서나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처럼 자신의 마음에 따라 상대를 재단하는 것이다. 

도움이란 갚는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인생에 있어 오늘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곁으로 볼 때는 거의 알아볼 수는 없겠지만 분명 이 순간이 지나면 지금보다 더 늙어간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지금 이 순간만이 내게 있어 가장 젊을 때이며 행복한 순간이며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렵고 힘들고 슬프고 아픈 그 모든 것들을 불행으로 여기기보다는 행복으로 바꾸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시간을 잡아야 행복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늘 깨어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고정된 시각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 

미움과 원망도 지나치면 그리움이 되듯이,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도, 그 사람이 내게 소중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잘못이나 실수에 관대하고, 작은 도움일지라도 감사해야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돌아보면 행복하다



미래는 동적이고 과거는 정적이라 할 수 있다. 

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노력이 더해져야 하기에 힘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것도 더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라 스스로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욕심에서 자유롭다 

일종의 휴식이라 할 수 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삶의 여유를 즐겨야 한다.

마음이 조급하면 즐거움조차 행복이란 것을 느끼지 못한다. 

함께하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면 평소 도움이 되는 사람조차 인정하기 어렵다. 

연못보다 강이나 바다에 더 크고 많은 고기가 살 수 있듯이, 내 마음의 그릇이 넓어야 많은 사람들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미움이나 원망, 그리고 불평이나 불안한 마음은, 결국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조차 쫒아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마음도 비춰보라. 

얼굴에 묻은 때만 씻어내지 말고 자신의 마음속에 채워진 나쁜 것들도 씻어내어야 한다.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푹 파인 주름살, 붓고 축 처진 눈꺼풀과 메말라터진 입술에서 당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라.

일상의 고생은 곧 경험이요, 삶의 지혜요, 행복임을 받아들일 때, 내 마음의 그릇의 물이 용솟음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든 행동이든 흘려야 행복한 것이다.

늙어갈수록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 대한 고마움은 더 깊어갈 것이다.

건강을 잃은 뒤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 사소한 것들조차 쉽게 할 수 없는 순간에 와서야 실감하는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조차 느끼지 않는 늘 스쳐 지나가듯 나와 함께 있는 것들이, 비로소 소중함이 고마움이 되는 그 순간, 아마 우린 인생에 대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모나 형제자매, 그리고 친구와 동료, 스승과 선배와 그리고 수많은 인연들이, 내 인생의 시작이요 끝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부담스러워하거나 귀찮아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부담스러워하는 그 순간 이미 그 사람을 대하는 나의 마음 역시 달라졌을 것이다. 

필요하면 먼저 찾아가야 그 필요함을 채울 수 있듯이, 도움은 늘 주변사람들에 의해 채워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나이 든 사람이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것은 추하다.

너그럽고 넉넉해야 나 역시 행복한 법이다.




거무불거유(居無不居有)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유(有)에 있으나 정작 보지 못하는 것은 무(無)에 있다.

거무불거유(居無不居有)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보이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보이는 것은 실천적인 행동이라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의 가치요 의지일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보이는 것이 표출되는 것이다. 

마음이 움직여야 의지가 되고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보살펴야 할 것은 마음이다. 

마음이 아름다워야 그 사람의 행동이나 모습도 아름답다. 

그러나 문제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혼동하게 하고 착각하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그 잘못을 저지른 지조차 모른다. 

그러므로 평소 삶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 잦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사랑하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이런 말들이 마음에 가득차  넘치도록 말이다. 




마음의 상처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상처에 대해서 의학적으로는 몸에 입은 외상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물체에 부딪치거나 찔려 피부가 찢어지면서 생기는 흔적이라 할 것이다. 

몸에 난 상처는, 부딪쳐 푸른 반점이 생기는 타박상, 마찰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찰과상, 뼈가 부러지는 절상, 

피부가 찢어져 생기는 열상, 그리고 칼과 같은 날카로운 것에 찔려서 생기는 자상을 말한다. 

이러한 상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그 상처가 남기고 간 흔적은 오랜 시간이 자나야 한다. 

특히 마음의 상처는 그 사람이 죽지 않는 한 영원하다. 

평소 아문 듯 하지만 실상은 아물었다기보다는 잠복해 있거나 옅어졌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나 입힌 사람은 상처를 입은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거의 대부분 마음의 상처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단점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서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이치와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처 대부분은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평소 늘 알고 지내던 가족이나 지인들의 말이 그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야 그렇거니 하고 지나갈 수 있음에도 가족이나 지인들의 말은 그러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내가 모르는 나의 잘못으로 인해 생긴 오해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급적이면 충고니 조언이니 하는 말보다 칭찬과 감사의 말을 더 많이 쓰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정을 배신하는 경우이다. 

평소 도움을 주고받던 관계였음에도 막상 어려움에 처해 도움의 요청했지만 거절했을 경우다. 

현 실정으로 보아 도저히 도와줄 수 없다면 모를까 자신이 입을 손해가 싫어 거절하는 경우는 더 아프다. 

그동안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 것이다.

정으로 맺어진 관계는 결코 계산할 수 없음을 명심하라.

과거란 반성한다고 해서 말끔히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든 삶이든 아니면 일이든 사랑이든 단한번의 잘못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유 불문하고 결과물로 들어난 잘못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군가 나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 변명을 하기보다는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다. 

시작은 언제나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

친하다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무심코 던진 농담도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좋은 말일수록 가급적 많이 하고, 나쁜 말일수록 가급적 적게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꼭 해야 할 충고나 조언이라면 상대방의 동의를 얻어 천금처럼 무겁고 귀하게 해야 그 말에 신뢰감이 생긴다. 

때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인식함으로써 나의 세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가을 하늘처럼 항상 푸를 수도 없으며, 망망대해를 붉게 물들인 저 노을처럼 항상 아름다울 수도 없다. 

바람 부는 날 언덕배기에서 자란 억새인양 가만히 있고 싶어도 흔들리기 마련이고, 

마을 어귀에 서있는 빛바랜 장승처럼 비바람이 불어도 묵묵히 견뎌야 한다. 

우리의 삶 역시도 그렇다. 

나의 생각이나 가치가 모든 사람에게 항상 올바를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고,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몸은 하나인데 수많은 것들을 탐하고, 능력이 닿지 않음에도 한없이 소유하려 한다. 

순간을 살면서도 마치 영원을 사는 것처럼 살아간다. 

세상은 삶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꿈과 희망이란 이름으로 열정을 다하지만, 

나이가 들고 세상에 대한 경험이 쌓여갈수록 오히려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세월을 돌아 삶이 깊어지고, 시련을 넘어 지혜가 생길 즈음에야, 비로소 나란 사람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다. 

이처럼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지 않으면 그 세상은 결코 나의 세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은 무채색 도화지와 같다.

그 도화지에 어떤 그림이나 글을 남기든 선택은 오롯이 스스로의 몫인 것이다. 

행복으로 가는 길이 반드시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지지 않듯이, 불행이란 늪도 반드시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도전은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열리지만 반대로 실패라는 고통이란 원치 않는 선물을 주기도 한다. 

파랑새라는 동화처럼 행복은 늘 곁에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너무 행복에 집착하여 스스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에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억눌려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현실을 받아들여 만족함으로써 행복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반항하기보다는 그 속에 속하고 순응함으로 행복할 수 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인생은 부질없다.”고 한다.

부질(麩質)은 곧 곡식의 낟알 속에 들어 있는 단백질을 가리키는 말이기에, 

저마다 열심히 산다고 발버둥치지만, 실상은 허송세월이요 영양가 없는 삶을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바쁘게 산 듯싶어도, 돌이켜보면 언제나 무엇인가 부족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어쩌면 그만큼 삶은 정답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삶은 늘 허망하다. 

살아갈수록 더해지는 건 적고 잃어버린 것은 많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할 수 있는 일도 늘어가는 것 같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늘어만 간다. 

젊었을 때는 이해할 수 있었던 것들인데도 나이가 들면 용서가 안 된다. 

흔히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들 하지만, 자신을 이해시키기가 너무 어렵다. 

매사에 적극적인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실패할지라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다. 

사랑에 실패해봐야 그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이, 주어진 일에 실패해봐야 지혜와 경험이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실패의 경험을 통해 다양한 생각이 자라고 자존감이 높아지며 가치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만족을 잘 느끼지 못한다. 

가진 것이 적으면 아주 적은 이득에도 만족을 느끼지만, 많을수록 그만큼 채워야 할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행복은 느끼는 자의 몫이듯 삶에 대한 가치는 그 삶을 대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일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다.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것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상처받고 사람으로 위로받고 사람으로 행복과 불행을 반복하면서 살기 마련이다. 

적극적인 삶은 나무가 많아지면 숲이 생기듯이 그 삶이 풍성해지고 행복해 질 것이다. 

설령 사람으로 인해 상처 입더라도 서로에게 기대고 사는 존재 또한 사람이다. 

사람이 그 얼마나 고독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지 기억하자. 

나이가 들어갈수록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너무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늘 하던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천리 길도 첫걸음부터라는 말처럼 일상의 일들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사소한 일도 하지 않고 미뤄두기만 하면 나중에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이 될 수도 있다. 

나이 들수록 부지런하고 또 부지런해야 한다. 

세상이란 고무풍선과 같아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이리저리 좌충우돌 정신없이 살았어도 시간이 흐른 뒤, 내게 주어진 파이는 늘 그대로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동안 만나고 헤어지고 또 주어지고 사라진 수많은 것들이 단지 우연이 아니었음도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 함께 함으로써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행복했음도 사실이다. 

내가 인식함으로써 나의 세상인 것이다. 




삼강오륜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전해진다.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의 삼강은 인간관계의 근본이요,  

부부유별(夫婦有別), 부자유친(父子有親),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군신유의(君臣有義)의 오륜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그러나 “모르는 게 약”이고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알면 알수록 그 삶이 피곤해지는 존재가 또한 사람이다. 

아는 것이 많을수록 그것을 탐하는 욕망도 커진다. 

그러기에 “바보는 주변에 적이 없지만, 천재는 주변에 적이 많다.” 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많다고 다 똑똑하지 않고, 경험이 많다고 다 지혜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은 그저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와 다름없다. 

삶에 활용할 줄 알아야 아는 것이다.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아는 척해야 하는 것이 삶이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도 있듯이 알면서도 넘어갈 줄 아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요즘 들어서 “차라리 몰랐으면, 못 듣고 보지 못했으면 좋았을 터인데“ 라는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그냥 지나쳐도, 넘어가도 좋을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마치 철천지원수 대하듯, 왜 이리도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지 모르겠다. 

참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며, 아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거짓 지식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아는 것도 새로운 변화에 따라 수정하고, 보완하고, 불필요하다면 과감히 버려야 할 것이다. 

잘못 아는 것만큼 삶을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도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문화의 변화에 발맞추어 때로는 늙은이처럼, 때로는 젊은이처럼, 생각이 유연해야 한다.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르까, 쫒아가자니 참으로 죽을 맛이다. 

아는 것이 많아지면 독선과 아집에 빠지기 쉽다. 

자신만의 생각이나 가치에 중심을 주다보니 주변의 의견을 소홀히 여기게 되는 것이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과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명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함에도 마치 저 혼자 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

앎의 기본은 바로 사람이다.






신뢰




신뢰란 주는 것만큼 받는 것. 

국어사전에 보면 신뢰는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나와 있다.

따라서 신뢰는 자신이 믿고 하는 사람과의 인간관계이며, 과거를 밑바탕으로 한 미래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호의적이며 최소한 손해는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기대인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나 행동에 대한 지지요, 협조를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신뢰의 기본은 남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남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마음이든 행동이든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말로하기보다는 실천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준 것보다 더 받으려 해서는 곤란하다. 

더 받으려하는 것은 신뢰가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불과한 것이다.

가난하든 부자이든, 아니면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든, 준 것 이상으로 요구해서는 기본이 무너진다.

혹여 준 것만큼 받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능력이나 현 상황에 어울린다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신뢰는 서로에게 손해가 가지 않아야 한다. 

설령 손해가 있어도 그만큼 서로에게 채워줄 수 있는 범위를 넘지 않는 것이 좋다.

없는 것에 대해 받으려하지 말고, 지금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을 주면 족하다.

신뢰란 이면에는 배반이 전제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은 바로 욕심이란 놈이다. 

욕심이 눈을 가리면 무리하게 되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내가 가진 것보다 상대방이 가진 것이 커 보이고 탐내게 되어 둘 중 하나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준 크기를 넘지 않게 욕심을 절제함으로 쌓여가는 것이며, 마음의 상처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일수록 소중하다



사람은 늘 앞을 바라보고 산다.

그렇기에 현재의 삶에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삶은 어쩌면 선택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항상 최상의 선택이라 믿어보지만 어디가 끝인지 그 결말을 알기란 쉽지 않다.

마음의 변화를 따라가기엔 욕망은 너무도 크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얼마나 될까?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선택 중에, 단 한 번이라도 마음에 드는 선택이 있기나 했을까?

그 선택이 과연 내게 최선이었느냐는 차치하고서라도, 과연 그 선택이 진정으로 내가 원하던 선택이었을까?

이처럼 우린 힘들고 어려운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의 뿌리를 살피게 된다.

그러나 그 뿌리는 원한다고 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뿌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우리의 모태를 이루는 조국이라든가 부모, 이름이나 성별, 모습이나 키, 출생지, 탄생이라든가 죽음, 등등, 마치 운명이니 팔자소관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뿌리는 하느님만이 영역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은 원망보다는 자존감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나만이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일수록 소중하다.

대부분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은 그 사람의 본 모습일 때가 많다.

자양분이 뿌리가 튼튼하게 하듯이, 근본과 같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자긍심이 필요하다.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하는 비관하기보다는 자신의 근본에 대한 사랑이 먼저다.

“나를 안다.”라든가, “나를 극복한다.”라는 것은, 선택할 수 없는 본연의 나를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인생이란 항상 미지의 세계다.

항상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아도 그 또한 똑같은 시간일 수는 없다.

그렇기에 먼저 자신만의 선택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쉬운 것이나 어려운 것, 단순하거나 복잡한 것에 대해, 미리 자신만의 기준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선택에 대한 자신만의 소신을 갖고 있어야 선택의 순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어려운 선택일수록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쉽게 헤쳐 나갈 수 있는 일이라면 어려운 일일 수 없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머리를 식힌다는 생각으로 일단 모든 걸 내려놓고 잠시 놀아보는 것도 좋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이나 즐거웠던 일, 또는 호기심은 있었으나 못해봤던 일을 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면 쉽게 갈 수 있는 것도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다.

과연 자신에게 옳은 선택은 무엇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그것은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라 말하고 싶다.

그것은 매일 당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고, 그 일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기에 그렇다.

뿌리가 튼튼해야 좋은 결실이 나오듯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해야 그 삶도 행복하다.

사람은 내 몸에 맞는 일을 할 때 가장 빛이 나는 법이다.





도움받는 것에 습관 들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생각 같아서야 모든 걸 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만들어 먹여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대신 씹어주고 소화시켜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위한다든가 무엇을 돕는 그 모든 행위조차 어쩌면 상대방보다 나를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입장에서의 도움이지 당사자에게는 불필요한 간섭이요 구속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내 딴에는 최선이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줘야지 도와주고 싶다고 상대방의 일이나 문제에 함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원하는 필요한 것을 해줘야지, 원하지도 않는 것에 대한 도움은 그저 간섭일 뿐이다.

이것이 도움을 나누는 데에도 도움의 객관성이 필요한 이유다.

도움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존재해야 한다.

혼자서도 충분히 해쳐나갈 수 있는 일임에도 끼어들면 오히려 더 꼬이는 경우도 많다.

혼자서 할 일과 여럿이 할 일, 힘으로 또는 마음으로, 아니면 경제적으로 도울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도와 줄 일일수록 보다 더 신중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대처함이 바람직하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내가 도울 일을 생각해야 한다.

도와준다는 마음일랑 버려라.

그 일조차 나의 일이라는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일을 하면 왠지 모르게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

남 몰래 하는 도움이 진정한 도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어떠한 도움을 받았는지 명확히 알아야,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고, 나중에 갚을 수 있다.

그만큼 도움의 객관성이 필요하다. 

도와줄 수 있는 일과 도와줄 수 없는 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물질적인 것들이야 어느 정도 가능할지라도 정신적인 문제는 잘못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때로는 묵묵히 하고 싶은 말을 들어주고 곁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될 때도 있다.

원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최상의 도움이다.

흔히 도와주고 욕먹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도움이 필요한 일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서이다.

그리고 도움의 진정성보다는 어떻게든 체면치레하려는 얄팍한 마음이 앞서기도 하다.

도움은 바로 극복하려는 그 사람의 의지에 나의 힘을 보태는 일인 것이다.

오직 그 사람만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이 먼저다.

요즘은 너 나할 것 없이 모두가 힘들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도움을 기대할 일이 그만큼 많을 것이다.

삶은 이어지는 것이기에 서로 도움을 나누는 것은 삶의 도리요 인지상정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받는 것에 습관 들어서는 곤란하다.

손익보다는 삶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는 것이, 삶을 더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상의 만족된 삶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자신의 주도하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쓰이는 언어 중 좋은 말인, 사랑·믿음·그리움…

함께 할 때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이러한 말들이 나를 떠나는 순간부터는 항상 무거운 무게로 남겨지게 된다.

슬픔이나 아픔 등이 신기루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인생의 많은 부분들은 항상 양면의 동전 처럼 인생을 저울질 하기 때문에,

불행이란 마귀에 스스로의 인생이 잡아 먹히지 않도록 자신의 신념과 의지하에 둘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말로만 행복을 찾을 수 없다.

벨기에의 극작가인 메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의 주인공인 틸틸과 미틸(일본식, 치르치르와 미치르)이

행복을 찾아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아주 먼 여행을 떠나지만, 결국 집에 돌아와서야 그토록 찾던 파랑새를 만나게 된다는 줄거리 처럼,

행복은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 주변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이 금방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은 것이 아니다.

행복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과 희생의 산물로 얻어진 것이 행복이다.

주변에 있다고 해서 거져 얻어지는 불로소득이 행복이 아니다. 

행복을 느낄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만 비로서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상대가 나보다 못하다 하여 남겨진 사랑이 그보다 못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의 위치에 만족할까?

사실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이 만족이란 순간의 위안이겠지만, 언제나 나의 요구와, 아내의 요구와, 아이들의 요구와, 내가 존재함으로서 야기되는 요구에서 이젠, 삶이 품고 있는 스트레스에 거의 질식할 지경이다.

뭐니뭐니 해도 인간다운 삶이란 어느곳 어느 장소에서든 사람답게 대접받고 사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것이 남자의 로망이겠지만,

문제는 오늘 이 순간에도, 십년이 지나고 평생이 지났다 해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가급적이면 그래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자기 최면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면 조금이라도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나밖에 하지 못하고 내가 아니면 안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비록 그 일이 보잘것 없는 일이고 주목받지 못하는 일이라 해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제데로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누가 만들어 줄까?

다름 아닌 본인 즉 자기다.

자신만의 능력, 자신만의 노력에 따라 만들 수 있다.

물론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란 말도 있지만 잠시 머무는 자리가 아니고 지키고 가꾸어야 할 자리는 거져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합당한 자리는 결국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일치해야만 가능하다.

젊을 때는 자신의 소양과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시키고 재칙질 해야 하지만, 중년이 되면 무엇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줄이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닿아 거기에 맞게 일의 크기를 정하는 것이 필요할 듯 싶다.

삶을 아둥바둥 쫓아가기 보다는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시간과 능력을 조율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리라 본다.

사랑, 행복이라는 허울 좋은포장지를 뜯어 버리고 진정한 의미의 삶의 깊이를 알아가는 삶을 출발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부부는 인생의 동반자



부부란 아주 특별한 인연이 없으면 이루어 지지 않는 신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누구에게도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나, 이성에게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사람 아니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수없이 방황하고 뜨거운 열정을 주고 받지만, 과연 결혼에 성공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사랑을 할때는 진실하다.

남자는 수많은 사람과 사랑을 하지만 한순간도 거짓된 사랑을 하지 않는다.

사랑에는 목적이 없어야 하고, 한사람 만을 바라보는 열정을 품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진실한 사랑은 외골수와 같아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늘 함께 있고 싶고, 바라보기만 해도 즐거움에 어쩔줄 모르고, 남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초라해 보일지라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이세상의 어느 여자보다 이쁘고 아름답게 보이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지금 함께 살고 잇는 아내 또는 남편과의 만남을 떠올려 보자.

다른사람 보다 더 사랑 했었고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더 절실했고, 상대방이 마음에 꼭 드는 대상이어서 결혼했을까?

물론 그래서 결혼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이 집안에서 혹은 친구의 소개로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낄 사이도 없이 배우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반평생이 지나도 <사랑의 감정은 이럴것이다.> 라고 막연하게 느끼고는 있지만,

딱 부러지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지만 사랑의 크기 만큼 슬픔의 크기도 크다 할 수 있다.  

때문에 사랑을 하는 동안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슬펐던 기억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점차 엷어지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되어 진다.

부부란 신이 만들어 준 숙명과도 같은 인연이기에 정말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사랑은 추상적이지만 결혼은 현실이다.”란 말처럼, 서로를 구속하려 하지 말고, 서로를 소유물로 취급하지 말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부부란 토라지고 싸워도 한 울타리에서 동고동락 해야 하기때문에, 화가 나고 사소한 갈등으로 다투었을 때는 빨리 푸는 것이 좋으며, 따로 떨어져 잠자리를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꼴보기 싫다고 아이들 방이나 거실에서 떨어져 자게 되면 습관처럼 굳어지기 쉽다.

싸워도 함께 살을 맞대고 자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스킨십이 이루어지기 마련이고,언제 싸웠었나 싶게 서로를 헤아릴 줄 알게 된다.    

부부란 모르는 타인과 타인이 만나 행복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함께 이루어 가는 과정이다.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조력자이고, 카운셀러이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고 극복하는 인생의 동반자이다.

서로의 장점을 나누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서로를 배려하고 어루만지고 다독거리고 보살펴서, 자신의 존재를 낮추어 상대가 추구하는 목적에 보다 빨리 도달할 수 있도록, 충실하게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부가 함께 모임이 갔다고 가정하자.

부부의 대화나 행동 중에 한 부부는 칭찬의 말과 상대방을 먼저 존중하는 행동을 하고, 

한 부부는 말만 하면 상대의 잘못한 부분만 이야기 한다면,

그 부부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명망있고 잘 어울리는 부부라 할지언정 진정 행복하게 보일까?

그저 치장하고 포장된 이미지로 둘러 쌓인 허깨비일 뿐이다.

상대가 잘되는 것은 곧 본인이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인정받는 일 임을 자각해야 한다.

시가나 처가의 식구, 또는 자주 찾아오는 직장의 동료나 친구와 함께 했을 때,

특히 언행을 가려서 하고, 가능하면 핀찬보다는 가벼운 칭찬과, 좋은 점을 부각 시켜 주는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누워서 침 뱉기”란 속담을 종종 잃어버리는 잘못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마음에 상처가 될 만한 말이나 무시하는 듯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 

“바람이 났다가도 남자는 부인의 품안으로 돌아오지만, 여자는 자식에게 돌아 온다.”란 말이 있듯이, 남자는 여자가 인생의 전부이지만, 여자는 부부의 정보다 모정이 더 크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남자는 결혼과 더불어 첫아이가 태어날 때까지가 인생에 있어 가장 아내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른다.

아내는 신혼 때에는 오로지 남편의 행동과 사랑만 바라보고, 남편을 위해서 맛있는 반찬을 만들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옷으로 치장하고, 예쁜 얼굴인데도 곱게 화장하고 남편을 맞지만, 아기의 탄생과 더불어 모든 일에  2순위로 밀려 버린다.

한 아이의 탄생으로 누구누구의 어머니 아버지란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순간 부터, 어쩌면 여자는 이성에 대한 사랑의 의미는 사라졌는지 모른다.

아이의 성장에 따라 돈의 씀씀이가 커지고, 교육비의 증가로 벌어 오는자와 쓰는자의 다툼이 빈번해져,

잦은 말다툼으로 번지는 일이 많아지고, 결국 서로의 마음에 상흔을 남긴 채 멀어지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중년이 되면 <여성은 남성 호로몬이 많아져 남성화 되고, 남성은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 여성화 된다.>는 말처럼, 남자는 점차 밖에 있는 시간보다 가정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여성은 가정에 있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돌아 다닐려고 한다.

아이들은 이미 자라 부모의 충고에 자주 태클을 걸고 품안을 벗어나려고 하고, 어머니였던 자리가 점차 엷어져 아내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이미 사랑의 감정이 떠나버린 남편에게서 아기자기한 감정을 기대하기란 꺼져가는 불씨와도 같다.

지혜로운 여자는 아이의 자리와 남편의 자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아이는 자라 품안을 떠나지만, 남편은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등 긁어주며 의지해야 할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식은 결코 삶을 나누는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다.

모두가 떠나고 텅빈자리에 홀로 남겨졌을 때야 비로서 여자는, 어머니에서 아내로 돌아온다.

이때서야 비로소 부부는 서로의 의미를 깨닿게 되고, 상대방의 변함없는 마음의 크기에 고마워 한다. 

행복은 시간으로 가늠할 수 없다. 

사람에게 일생 동안 몇 번의 행복이 돌아올까?

한평생 기쁨을 누리고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잠시의 순간을 평생의 행복으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아내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대화하라.

서로의 몸이나 마음에 익숙해져 권태를 느낀다면, 빨리 처음 만나 사랑했을 때를 떠올려라.

타성에 젖으면 내가 먼저  무엇을 해 주기 보다는, 상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낯 간지러울 때까지 사랑한다 말하라.

서로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 있어야만 믿음이 생기고 신뢰가 쌓이는 법이다.

믿음이 없음은 불신을 낳고, 배려가 없음은 외로움이 되고, 존경하는 마음이 없음은 지속성을 잃게 된다. 

사랑의 끝은 오르가즘이지만 부부의 끝은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다.



령혼™

단상·칼럼·포토에세이·저널리스트 김진철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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