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상처 받기를 두려워 마라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이해의 시작이다



사람의 마음은 바람과 같다.

좋을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살랑거리다가, 조금만 틀어지면 비바람처럼 거칠고 사납다.

때로는 처한 상황에 따라 이런 마음을 감추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달래려고 애쓰지만 잔잔하다고 해도 바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듯, 자신의 마음일지라도 컨트롤하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자신조차 제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남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이다.

입장을 바꿔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습과 얼굴이 다르듯이 성격이나 지향하는 가치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도 분명하다.

자신의 입장과 다르다고 버럭 화를 내거나 거리를 두어서는 곤란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이해의 시작인 것이다.

상흔 치유, 마음의 상처 받기를 두려워 말아야 하며, 사람은 자신의 의지대로 하지 못하는 것도 많다.

특히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마음을 갖기 어렵다.

이성적 사랑만으로 진정한 사람이라 할 수 없듯이, 소중한 사람에게는 왠지 다른 사람보다 관대할 수밖에 없다.

내 마음도 나의 이익에 따라 달라지듯이 상대방의 마음 역시 상대방의 이익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서로의 이익이 부합되고 같은 방향을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내게 속한 것을 서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마음은 물론 내가 가진 재산이나 시간까지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어떤 사물이나 말 그리고 상황에 대한 본질적인 뜻을 알고 행동하는 것이다.

단지 아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해=공감>이라 할 것이다.

사람에게는 각자 보는 눈(관점)이 다르다.

빈자와 부자의 눈이 다르고, 높은 자리에서 보는 눈과 낮은 자리에서 보는 눈이 또한 다를 것이다.

햇살이 눈부신 곳에서는 그림자를 볼 수 없고, 큰 나무가 있는 곳에 작은 나무가 잘 자라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이런 보는 눈의 차이가 바로 사람관계의 오해와 갈등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는 <함께 한다>라는 마음이 우선이다.

사람은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는 결국 자신일 수밖에 없다.

이런 결정 이전에 신중하게 수많은 데이터를 비교·분석하지만, 이 역시 자기 생각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해한다는 것 역시 자신의 생각 안에 속해 있음도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자신의 생각에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뜻을 가감 없이 믿어주는 것이, 바로 진정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원인은 세상보다 자신이다



세상을 원망하는 이유는 세상은 공평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만을 위한다고 느끼게 되면 세상을 원망하거나 탓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그 사람의 가치나 지식 그리고 경험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난다.

비록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만 세상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제의 원인은 언제나 자신임에도 세상 탓만 하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이나 사람마다 각자 자신만의 세상이 있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에게 세상은 같을 수도 공평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자기의 세상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삶의 가치요 인생의 목표이며 희망사항인 것이다.

따라서 세상을 원망하는 이유는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반발심과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기쁘고 행복할 때 세상 탓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몽골 울란바토르 근교에 있는 돌궐의 재상이자 명장이었던 돈유쿠크 비문에는, "성(城)을 쌓는 자는 망(亡)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興)한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비문에 쓰인 성(城)이란 단어는 바로 폐쇄적인 닫힌 공간이며, 길이란 바로 자유이며 개방된 공간을 의미한다.

원망은 이런 눈과 마음이 닫힌 폐쇄적인 허상의 세계인 것이다.

결국 원망은 사람을 피폐케 할 뿐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으면 세상에 대한 원망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것들 중 아름다움과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보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은 물론이고, 사랑과 같은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도 접해봐야 한다.

불우하고 힘든 환경보다 그 환경을 경험함으로써 얻는 삶의 지혜를 소중하게 여겨야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불만족스럽게 보일 것이다.

사람을 경험할수록 도와주는 사람은 적고 이용하려는 사람은 많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어렵고 힘든 경험을 해야 사람에 대한 이해와 소중함을 알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원망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게 있어 소중하다는 반증이기에, 더 많이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리 친한 사람도 불평을 이길 사람은 없다.

마음에 안 들고 못마땅한 것이 있더라도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참아 넘기는 것이 좋다.

작은 일에 일비일희할수록 좋은 감정보다 나쁜 감정이 들 확률이 더 높다.

미움이 더해지면 원망이, 사랑이 더해지면 행복이 되는 것이다.

원인은 세상보다 자신이다.





 자존감은 행동으로 세우는 것



염려는 상대방을 위해 이것저것 마음을 써 주는 것이요, 간섭은 상대방이 원하거나 바라지도 않았는데 공연히 나서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염려와 간섭은 단지 자기입장에서 남에게 하는 일련의 행위라 할 것이다.

때로는 염려와 간섭에 앞서 믿음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 더 현명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흔히들 팔방미인이니 만능인간이니 하지만 어디엔가 부족한 존재가 사람이다.

염려와 간섭도 이런 미숙함에서 생기는 감정인 것이다.

비록 자신의 입장에서는 좋고 옳은 것이지만,

이 역시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백범 김 구 선생의 말씀 중에, “칭찬에 익숙하면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고, 대접에 익숙하면 푸대접에 마음이 상한다. 문제는 익숙해져서 길들여지는 내 마음이다.”라는 말씀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만큼 간사스러운 것도 없다.

그래서 <집은 좁아도 같이 살 수 있지만, 속이 좁은 사람과는 같이 살기 어렵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좋을 때는 한없이 좋다가도 싫어지면 무슨 짓을 해도 별무소용이다.

염려는 나의 부족함에 기인하고 간섭은 상대방의 마음을 채우지 못함에 있다.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비단 몸뿐만 아니라 정신이 함께 자란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식이나 경험이 쌓이고 육체에 힘이 생기면,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법이나 관습의 제약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실재 능력이 없지 못했던 것도 있다.

어린 시절 그 넓고 크던 학교운동장이 작고 좁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답다는 것은 가슴에 신념을 담고 있는 사람, 가치를 이룰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삶을 통해 옳고 그름을 자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간섭이라 느끼는 것은 불편함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말과 행동이 나의 기준에는 맞지 않아서다.

마치 어울리지 않거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왠지 모르게 거리감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나보다 제3자의 눈이 정확함으로, 간섭조차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요즘 대학생조차 어머니께 물어보고 의사결정을 한다고 한다.

대학생이라면 자기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의 지나친 염려와 간섭이 자신의 일 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마마보이를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염려와 간섭을 줄여야 할 것이다.

자존감은 행동으로 세우는 것이다.





현재에 우선순위를 두어라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어떤 두려움도 내게 똑같을 거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어제 본 해와 달이 오늘과 다르듯이 세상이나 나의 감정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그저 내가 아는 것은 지금 내 눈이 보이는 현상일 뿐이다.

이미 지난 정보와 지식과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마치 전부 아는 것처럼 처세하듯이 사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도 마치 아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살아가는 게 삶인 듯싶다.

꼭 알아야 할 것도 아니데 모르면 마치 내 삶이 남보다 뒤처진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친구를 사귀는 기준도 사람 됨됨이보다 그 사람을 알아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더 민감한 것이 현실이다.

자고 일어나면 습관처럼 주어진 일을 반복하면서도, 그 하루를 어떻게 채우는 것이 진정 올바른 삶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마치 무대 위의 배우가 무엇을 할지 모르는 것과 같다.

누군가에게 충고하는 것 역시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가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스스로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선택할 수 있도록 의견을 전달하는 선에서 그쳐야하는 것이다.

충고나 의견은 나도 거기에 동참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다.

한사람에게만 책임 지워서는 안 된다.

완벽하게 안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어느 정도만 알면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여긴다.

또 이미 알고 있는 것도 잘못 알고 있는 것도 태반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눈을 통과하여 인식하는 순간 이미 아는 것으로 믿어버린다.

다시 되집어 곱씹어 보기에는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떤 것에 대해 얘기할 때 말문이 막히는 것은 그것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술술 잘 넘어간다고 해도 상대방보다 조금 더 알아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늘 새로운 것일수록 좀더 알려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매일 하는 일상조차 더 많이 알아야 새로워진다.

아는 것만큼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급변하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다.

오늘 배우고 습득한 것조차 얼마 후에는 활용할 수 없을 정도다.

그만큼 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명확한 주장을 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확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집착보다는, 현재의 삶을 우선순위로 사는 것이 더 즐겁게 사는 방법일 것이다. 

확실하지도 않는 미래의 일들에 대해 집착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살아지는 것과 살아가는 것



살아가는 것은 나의 의지가 개입된 삶의 모습이고, 살아지는 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의 삶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모습일 것이다.

열정이 살아 꿈틀거리는 젊었을 때는 대부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지만, 점차 나이가 들고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쌓여갈수록, 왠지 모르게 살아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처럼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각이 생길 즈음, 굳이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지 않더라도, 의지와 신념만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피나는 노력을 해도 실패만 거듭하는 사람이 있고, 그저 숟가락만 얹었을 뿐인데 하는 일마다 성공만 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세상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의 인생이 되지 못한다.

흔히들 세상은 노력하는 자를 위해 존재한다고들 한다.

모두들 자신은 세상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는 자신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성공했다고 해서 그 삶이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며, 실패했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니다.

많은 일을 계획하고 이루기 위해 노력을 다해도, 막상 성공이라 인정하기도 쉽지 않다.

열심히 한 것만큼 성과가 있고 보람을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지난 삶의 흔적을 돌아보면서 도대체 뭐 때문에 살았는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할 때도 많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후회도 하고 반성도 한다지만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미래는 불투명하다.

자기 딴에는 꽤 열심히 살아왔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 모두가 마음먹기 나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만으로는 인생이란 그릇에 담길 실체를 만들 수는 없다.

마음먹은 것들을 행동으로 하나 둘, 때로는 더해지고 덜어져 구체화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살아지는 삶이 아닌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살아온 날도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 역시 모르긴 마찬가지다.

내가 했고 또 해야 할 것들이지만 그것이 과연 내 인생인지도 알기 어렵다.

분명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인데 과연 내가 주인공이었나 싶다.

나를 사랑 해야하는데 늘 원망만 한다.

자신을 사랑해야 은연중 품성도 밝아져 남 보기에도 좋다.

굳이 삶을 이해하지 않아도,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도,

병마나 뜻밖의 재앙이 닥치지 않는 한, 적당히 먹을거리만 주어지면 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무탈하고 편안한 삶일지라도, 내가 인정하고 만족하지 않는 삶은 진정한 나의 인생이라 할 수 없다.

먼저 나를 생각하고, 나를 바로하고, 나를 굳건히 해야 한다.

나를 생각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요, 나를 바로 한다는 것은, 나의 가치에 대한 자각이며,

나를 굳건히 하는 것은, 그 가치를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하려는 내 마음의 다짐인 것이다

그것이 살아지기보다는 살아 가야하는 이유다. 




상처받기를 두려워 마라



“비 내린 땅이 굳어지고, 부러진 다리가 더 튼튼하다.”란 말이 있다.

경우에 따라 마음에 입은 상처는 평생을 갈 때도 있지만, 대부분 인생의 자양분이 될 때가 더 많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스스로 어떤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입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마음 상태에 따라 잘 되라고 우연히 던진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처받기를 두려워마라.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알고 더 많이 찾게 되는 것처럼, 비록 마음의 상처를 입더라도 직접 부딪쳐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다.

직접 만나 대화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어떤 의도로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는지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

잘못이 있다면 사과하고, 오해가 있다면 풀고, 그래도 안 되면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도 좋다. 

혼자 끙끙거릴수록 진행형이 된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첫째로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상에서 일도 그렇지만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욕이나 시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대부분 자신보다 못나고 부족한 사람을 상대로 욕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을 알면 된다.

둘째로 남의 말을 욕으로 듣지 말자.

말 중에는 나쁜 말보다 좋은 말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서로 이해가 맞는 사람끼리 하는 말에 민감할 필요는 없다.

설령 제 3자를 통해 나쁜 말을 들어도 화를 내기 보다는, 그 사람의 메시지 내용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다.

별 것도 아닌 일을 공연히 들쑤셔 사건화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셋째, 무조건 믿어라.

비단 상대방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해야 한다.

나를 향해 상대방의 어떠한 비난의 말도 상대방에 대한 그동안의 나의 처신에 대한 대가인 것이다.

정작 나는 상대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상대방에게만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어리석다.

자신에 대한 믿음 없이는 상처가 치유될 리 없다.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은 용서라고 한다.

그러나 용서도 마음으로 털어내지 못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그저 내 자신이 불편하기 싫어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것까지 억지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진정으로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겨났을 때 상대방보다는 내 자신에게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래야 상흔까지 깨끗이 치유할 수 있다. 





사과 혹은 용서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는 것



사과는 자신의 몫이지만 용서는 타인의 몫이다.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짐승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사과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중에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윗사람이거나 능력을 가지 사람도 아닌데 왜 내가 굳이 사과까지 하느냐고 강변한다.

그러나 <사과나 용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과나 용서를 통해 내 영혼이 맑아지고 또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상대방이 용서해주지 않더라도 사과라는 행위를 통해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자기발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이라는 터전을 통해 더하고 빼는 과정을 겪어야 올바른 가치관이 생기는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면 그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알아야 주어진 삶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이 즐거우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행할 정도라면, 그 사람은 이미 자아를 상실한 좀비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현실이란 삶에 속박당해 왜 사는지 그 의미조차 잃고 살 때가 많다.

당연히 도와주고 함께 해야 할 자리에도 당장의 이익을 계산하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조차 삶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과는 말과 행동에 진심이 담겨야 한다.

찾아갈 때는 무엇인가 아쉬운 것이 있어서임은 불문가지다.

마찬가지로 사과의 당위성 역시 그 사람이 내게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한 잘못을 충분히 알기에 사과할 것이라 믿고 있다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 오히려 내가 당황스럽다.

결국 누가 문제인지 냉정하게 평가해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상대방에 대한 예절을 자칫 잊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익숙함이다.

익숙함은 잘 아는 상태를 말하는데, 우린 때로 그것을 친분이나 우정의 척도로 착각한다는 것이다.

익숙하다 해서 반드시 친한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익숙함으로 관심이 줄어들고 지나치게 막 대할 수 있음으로, 사실 익숙하다는 것은 어쩌면 무서운 일이다.

그러므로 사과와 용서는 바로 인간관계의 복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담긴 사과에 화를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혹자 거친 말로 화를 내도 한순간일 뿐, 그 순간이 지나면 도리어 친해지는 경우가 많다.

맞은 사람은 편히 자도 때린 사람은 편히 못 잔다는 말처럼, 진심으로 사과했으면 나중은 상대방의 몫인 것이다.

너무 자신에게 한정 짓지 말아야 한다.

원망은 너무 자신에 대한 입장이 강해서 생기는 마음의 병인지도 모른다.

자신보다 조금만 상대방의 입장에서 차분하게 헤아려보면 이해할 수 있는 측면도 많은데 말이다.

너무 자신의 입장과 생각이 개입되어 그렇다.

그러므로 사과나 용서 역시 상대방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다.

자신을 잊지 않으면 족하다.




꿈이 있기에 행복하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꿈을 꾼다.

그러므로 행복하다 느끼는 감정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수많은 꿈이 있듯이 수많은 행복이 존재한다.

내가 행복하다 해서 다른 사람 역시 행복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

행복은 남이 아닌 바로 내가 느끼는 것이기에 스스로 찾아야 한다.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바로 꿈인 것이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계획이나 도전 그리고 노력, 이모두가 바로 자신만의 꿈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꿈을 만들어가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꿈을 따라가기도 한다.

이처럼 그 꿈 대부분은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린 그 꿈으로 행복하다.

행복은 꿈 꾸는 자의 몫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행복은 기대하기 어렵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일과 새로운 일상이 있어야 더 많은 행복도 주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변해가듯 행복 역시 지금의 삶에 머물지 않는다.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행복은 언젠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부부만큼 갈등이 많이 생기는 관계도 드물 것이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크기만큼 그에 반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 역시 클 것이다.

사랑하는 만큼 미움도 클 것이고, 관심의 크기만큼 실망 역시 클 것이다.

이처럼 일상에서 사랑이 클 때는 아무리 큰 잘못도 쉽게 용서할 수 있지만, 사랑이 점차 삶에 무뎌갈수록 작은 잘못조차 왠지 이해보다는 무시당한 듯싶고 서운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에게 칼집이 되어야 한다.

칼집은 칼날이 무뎌지지 않도록 칼을 꽂아 넣어 두는 물건이다.

날카로운 칼로부터 남뿐만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다. 

삶이란 전쟁터에서 열심이 싸우다 돌아온 서로에게,

안전하게 쉴 수 있도록 하는 칼집과 같은 공간이어야 한다.

부부는 하나가 아닌 둘이다.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 삶의 한 공간에서 행복을 가꿔가야 하는 운명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홀로 무엇을 하기보다는 서로 의논하여 함께 하는 것이 옳다.

함께 계획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날카로운 칼날보다는, 그 칼날을 감싸는 칼집의 역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부부는, 서로가 서로의 삶과 인생을 지켜주는 보호자임과 동시에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의 자랑임과 동시에 흠집이며 치유할 수 없는 상흔과 마음의 상처이며, 아픔이다.

아무리 잘해도 하나만 잘못하면 잘못이 되는 관계다.

싸운 후 기분 좋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칼로 물 베기가 부부싸움일지언정 후유증이 남기 마련이다.

가능하면 애당초 싸우지 않아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싸울지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잃지 말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자존심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예의가 바로 서로에 대한 칼집인 것이다.

서로에게 사과나 용서할 수 있는 사람도 부부다.

아무리 서로에게 잘하려고 해도,

막상 나쁜 일이 닥치면 감정 상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서로의 입장과 생각과 가치가 다른 사람이 비록 부부로 함께 살지만 항상 마음이 같을수는 없다.

나는 기쁘고 행복해도 상대방에까지 그렇다고 믿기에는 분명 그렇지만은 않다.

감정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면 이런 오해는 늘 반복될 것이다.

때로는 그 소중함으로, 때로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이, 도리어 서로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매번 매 순간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배려함이 옳다.

나를 고집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

신혼에는 대부분 사랑 때문에 싸우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삶이 현실로 다가올 때는 주로 돈 때문에 싸운다.

서로를 지키고 보살피고 자식의 양육에는 정성도 필요하지만, 그 정성을 뒷받침할 경제적인 여건도 갖춰져야 한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대에는 관심어린 말과 더불어 작은 선물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부에게는 사랑과 관심이란 칼과 이해와 용서라는 칼집도 필요한 법이다.

관심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다.

지나친 관심은 도리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하기에 과한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알게 모르게 은근슬쩍 부담이 가지 않도록 공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도 안 된다.

상대방의 기분 변화나 분위기에 맞는 센스 있게 하는 것이 포인트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감싸고 지키려는 진솔한 마음의 표현이 바로 서로에게 칼집이 되는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




마음에 남아야 진정 아름답고 소중한 것



정으로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차디찬 이성으로 사는 것보다 뜨거운 욕망으로 사는 것이 더 인간적이다.

이성적으로 살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은 들을지 몰라도 스스로는 꽤 피곤하게 보내야 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말아야 하고, 하고 싶은 말도 가려서 해야 하고, 먹고 싶은 것도 식사예절에 맞게 먹어야 한다.

결국 내가 아닌 남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의식하면서 사는 것만큼 사람을 피곤하고 지치게 하는 것도 없다.

비록 다소 이중적인 모습일지라도 남이 없는 곳에서는 다소 흐트러지고 거친 말투가 더 인간적이다.

자신의 좋은 면만 보여주지 않아도 될 가족들에게까지 너무 이성적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성은 감성이 너무 과하거나 덜하게 작용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이면 족하다.

공연히 이성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지혜는 이런 이성과 감성의 조화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성에 치우치면 사람이 멀어지고, 감성에 치우치면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

사람사이에는 정이 흘러야 친해지고, 그 정속에 이성이 함께해야 오래도록 친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흘러야 할 정이 흐르지 않고 욕망으로 넘쳐나면 스스로 망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성 역시도 지나치면, 결정이나 선택을 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을 위해 살다 죽어간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돈과 명예만을 쫓아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초라할 정도로 작은 부분이었을지라도, 그 사람에게도 반드시 위하고 싶은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주변 사람이 즐겁고 행복해야 스스로 즐겁고 행복하듯이, 산다는 것은 혼자만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공동분모가 바로 삶의 터전인 것이다. 

불만이 쌓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살면서 생긴 이런저런 불만이 마음에 쌓이면, 평소 도움 받았던 것들이 지워지기 쉽다.

잘하는 것은 적게 보이고 못한 것들만 왠지 눈에 거스르게 된다.

그러므로 왠지 친했던 사람이 거북하게 느껴질 때는, 지금의 불편함보다 예전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그려보라.

아마 불편함보다 소중함이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커다란 슬픔일수록 눈물이 잘 나지 않는 것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은 먼저 마음이 안다.

이처럼 살면서 불행했던 순간들보다, 행복했던 순간들을 더 많이 떠올릴수록 그 삶은 더 아름답고 빛날 것이다.

쥐구멍을 벗어나야 더 넓은 세상이 보이듯이, 불만이란 마음의 궁상에서 벗어나야 고마움이란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마음에 남아야 진정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을 갖자




이름은 그 사람의 값어치다.

명성이 알려져 가 값어치를 높아지면 그 사람의 언행의 값어치 역시 올라가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평소에는 아무리 옳고 좋은 말을 해도 그저 여러 사람의 말 중의 하나로 치부되지만,

이름이 알려지면 비록 사적으로 하는 사소한 말일지라도 귀 기울이게 된다.

그 사람의 말에 무게가 실리고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개명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짓기까지 많은 의미를 담았던 부모님의 마음을 한번쯤은 헤아려야 할 것이다.

물론 이름 때문에 주변사람부터 놀림의 대상이나 손해를 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으로 인해 오히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장점도 있는 것이다.

이름 위에 쌓여진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평소 다른 사람보다 의롭고 정의로운 일을 선도적으로 한다든가,

학자나 의사와 같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남들보다 부자인 경우 대접을 받기 마련이다.

즉, 일반 대중들보다 우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그 이름에 값어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이름에 대한 가치를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주변에서 명성이 나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이 모여든다.

돈과 재물이 모여들고 그 이름에 기대어 도움과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도 모여든다.

그렇게 그 이름으로 인해 인과관계가 생기고, 위아래의 질서가 생겨나고, 온갖 욕심과 욕망도 생겨났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서로 만나면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기대고 바라는 것이 있기에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름이 가진 힘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또 다른 나의 인격이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사람이 지닌 이미지가 함께 떠올려진다.

이렇듯 세상에서 하나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대접받는 것은 바로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기 이름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름에 대한 이미지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 말이다.




서로의 차이를 알아야 진정으로 친해진다



릴 적만 해도 사람을 사귀는데 무슨 이유가 있었으랴.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함께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같은 환경에서 함께 성장했기에, 생각하는 방식이나 성격이나 닮아 서로 딱히 불편한 점을 몰랐었다.

추억도 같고 생활여건도 비슷비슷해 어쩌다 생기는 다툼조차도 친분을 돈독하게 했다.

함께만 있어도 마냥 즐거웠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건 한편으로는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늘 우선순위에 있던 사이가, 가족이란 책임 져야 할 사람이 생긴 뒤부터 은연 중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굳이 사랑이라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함께 삶을 같이 하는 사람으로써의 의무가 아닌가 싶다.

아끼고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될 나만의 가치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더 소중하다.

 어떤 사람은 거친 말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아부의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말에 예의가 있어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존대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존중하라는 뜻이다.

심하게 다툴지라도 가능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말이나 상대방을 비하하는 언행은 자제함이 옳다.

거친 말도 일종의 습관이다.

사람과의 거리를 알 필요가 있다.

좀 친해졌다 싶어 가까이 가면 오히려 상대방은 흠칫 놀라 거리를 벌린다.

또 반대로 조금 더 친해지고 싶어 가까이 다가왔으면 싶은데, 도무지 다가오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어쩌다 대화를 나누어도 겉돌기 십상이고, 함께 있으면서도 왠지 서로 어색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과의 거리는 정성에 비례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진정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지, 소중한 사람인지 내 마음에 물어봐야 한다.

내 마음에 거리낌이 있다면 진정한 소중함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과의 거리나 차이 역시 내가 원인인 경우가 더 많다.

마음이 시키는 사람이라면 기꺼워해야 한다.

친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다.

억지로 숨기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람은 본디 그렇게 생겨먹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이 나의 생활 영역에 들어오면, 먼저 내편이라는 생각에 모든 것을 좋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본디 같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났더라도 그 모습과 생김새가 다른 법이다.

이처럼 서로의 차이를 알아야 진정으로 친해질 수 있다.



령혼™

단상·칼럼·포토에세이·저널리스트 김진철 웹사이트

    이미지 맵

    단상 다른 글

    댓글 0

    *

    *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