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있어 사람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삶과 절망



일이란 언제나 그렇다.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쁜 일만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좋은 일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 일에 내게 반드시 좋은 결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좋은 글을 읽고 좋은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면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일에 대한 결과 보다 그 일을 통해 얻는 만족의 정도다.

절망은 그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때 찾아온다.

지금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치로서는 도저히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해도 안 된다는 자신의 무능에 대한 마음의 확인인 것이다.

허무함과 좌절감이란 벽에 갇혀 자신조차 부정하게 되는 상황까지 이른 것이다.

이처럼 사람을 진정으로 병들게 하는 것은 바로 절망이란 놈이다.

절망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잘 모르는 데에서 온다.

능력이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으로 내부적인 힘과 외부적인 힘 모두를 의미하는 말이다.

자기 본연의 정신과 육체의 힘으로 하지는 못해도, 남의 도움을 받아서 할 수 있는 힘도 나의 능력에 포함된다.

즉, 남의 힘을 어떻게 활용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도 능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너무 크게 또는 너무 작게 보기보다는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삶이란 세상을 <나>라는 그릇에 담는 작업이다.

비록 온갖 더러움과 부조리와 모순이 혼재 되어 있는 세상일지라도,

삶이란 인생의 과정을 통해 거르고 걸러,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로 그 그릇을 채워야 한다.

기쁨이란 열매를 담으면 행복이요, 슬픔이란 열매를 담으면 불행이다.

인생은 탄생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종결되는 것처럼, 절망이란 삶의 과정일 뿐 종착점일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인생은 포기하는 순간이 새로운 출발점이라는 말이 있다.

삶의 밑바닥에 가보지 않고 삶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절망은 없다.

천 길 낭떠러지기에 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낭떠러지기까지 도로 올라갈 필요는 없다.

떨어진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인생은 바로 내가 중심이며, 채움은 삶의 흔적이며 비움은 삶의 깨달음이자, 인생에 있어 사람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가면(假面)



흔히들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표정에도 드러난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워낙 거짓과 위선이 판치는 세상이라 습관처럼 굳어져 얼굴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속이고 숨기는 것이 일상이기에 잘못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라 여기기 때문이다.

잠시의 쪽팔림이나 부끄러움보다는 손에 들어오는 이익에 더 집착하는 것이다.

이처럼 언제부터인가 양심보다는 물질이 더 우선인 세상이 된 것이다.

살아보면 세상에 양심이나 자존심만큼 쓸데없는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기뻐야 행복이 되듯이 양심은 나를 지탱해주는 뼈대와 같은 것이다.

비록 남들의 눈에는 별스럽게 보여도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다.

가면은 바로 이러한 것을 가리는 행위다.

즉 목적을 위해 나를 버리는 행위다.

삶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이어진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진심을 다해 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혹여 민낯을 보일세라, 만날 때마다 성형하고 화장한 얼굴만 보여 주다, 정작 자신의 본모습마저 모를 수 있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상대방이 가면을 쓰고 나를 대하였음을 알게 되는 순간,

아마 상대방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은, 평생을 두고서도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사람은 망각을 통해 편안함을 얻는 법인데, 그럴 수 없다면 그 어찌 불행하지 않을까?

모두 진실할 수는 없지만 소중함은 내가 진실할 때 얻을 수 있음이다.

속이는 사람이 잘못일까?  아니면 속는 사람이 잘못일까?

요즘은 모르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이라서, 속이는 사람보다 속는 사람이 오히려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열 사람이 한사람 바보 만드는 건 쉽다.”라는 속담처럼, 속이려고 작정하고 달려들면 벗어날 방법도 없다.

얼굴이나 모습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생각마저도 가면을 쓴 사람을 어찌 이기겠는가?

두 눈 크게 뜨고 바라봐도 속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선의의 거짓말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위한 변명일 뿐 당하는 사람은 아니다.

아무리 선의로 한 거짓말도 알면서 한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배려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내게 이익이 되면 선뜻 달려들다, 조금 손해를 볼라치면 언제 알았나 싶게 도망가는 처신은 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산다.

살다보면 알면서 혹은 몰라서, 또는 의도적으로 혹은 무의식으로, 양심이란 저울에 비춰 자신도 모르게, 어느 정도는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다.

저 홀로 법을 지키며 정직하게 산다고 해서 세상은 항상 깨끗함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란 명제 앞에서, 자신의 당당함만 앞세워서는 세상에 순응하고 살기 어렵다.

가면을 나를 위해서는 쓰지 말아야 한다.

결과에 대한 의식 없이 한두 번 넘기다 보면 나중에는 자신의 본모습조차 잃어버릴 수 있다.

내가 나를 잊으면 다른 사람 역시 나를 잊게 됨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힘으로 약한 사람을 억압하거나,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기 위해서는 결코 가면을 쓰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가면은 불합리한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써야 한다.




우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는 "우리"다.

우리라는 말은 <나를 포함한 내 편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경쟁심이나 편 가름이 아닌, 같은 편이라는 동질감과 안정감을 갖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나, 너”라는 따로가 아니라, “나와 너”라는 다소 집단적인 의미가 아닐까 싶다.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같은 일을 한다는 동료의식이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린 서서히 <우리>라는 개념을 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우리”라는 말은 자기나 자기편을 가리킬 때도 주로 사용한다.

그리고 나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통칭하는 말로, 은연중 나와 가깝다는 친분표시의 말이기도 하다.

“우리”라는 표현은, 곧 같은 생각이나 가치를 공유하는 같은 편이었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라는 말은, 나를 기준으로 하여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는 말이기에, 상대방의 호의를 너무 일방적으로 해석하고 믿는 부작용도 경계함이 옳다.

“우리”도 결국 사람과 인간관계의 일부이다.

“우리”기에 일방적으로 희생을 요구하거나 강요하기보다는, 상황이나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인정해야 한다.

서로 부담 없이 어려운 일이나 즐거운 일을 함께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우리>가 될 수 있다.

손해나 어려움뿐만 아니라 이익이나 즐거움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 없는 <우리>란 없다.

가족이나 친구, 선배나 후배, 직장의 상사나 동료처럼, 공동의 생각과 가치, 또는 목표에 따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류의식인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내 삶과 일상이 일어나는 주된 생활터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관계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의무임과 동시에 책임이라 할 것이다.




비움과 채움은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과연 사람은 진정으로 만족할 때가 있을까?

아마 있다손 치더라도 그 순간은 매우 짦은 일순간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순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먹고 마시는 공기나 물처럼, 비단 기본적인 의식주에 관련된 것이 아닐지라도,

이성과 감정의 충족과 같은 정신적인 것 역시 삶의 주요한 포인트일 것이다.

채움은 삶의 흔적이며 비움은 삶의 깨달음이다.

그래서 어쩌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채워가는 과정일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은 채우고 버리기가 너무나 어려운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여반장과 같이 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채워진 것을 때로는 모두 사용해서, 또 때로는 소용없어서 버리기도 한다.

이런 버리고 채우는 반복된 과정이 바로 인생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선택의 폭은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한 그렇게 줄어든 만큼 채우는 것은 어려운 반면 비워야 할 것들은 점차 늘어만 간다.

그렇기에 자기 것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자기생각 안에 갇혀 주변을 살피는 여유를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그릇에 고인 물도 베풀고 나눔으로 비울 수 있어야, 그 그릇의 물은 늘 맑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릇의 쓰임이 무엇인가를 담을 수 있어야하는 것처럼 사람도 필요한 곳에 쓰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여유가 있어야 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사람이 비워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속에 앙금처럼 자리하고 있는 욕심이다.

자신에도 조금이라도 이득이면 무조건적으로 좋아하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공연히 이런저런 트집을 잡게 된다.

옷장 속에 많은 옷이 있어도, 외출할 때 정작 입고 가는 옷은 몇 개 되지 않는 것처럼, 버릴 때도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욕심 때문에 비우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적당히라는 것은 없다.

적당한 것은 내 몸의 일부처럼 딱 들어맞아 어울린다는 말이다.

이처럼 채우고 비움을 통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지혜일 것이다.

채워 넘치면 적(敵)이 많아지고 너무 많이 비우면 스스로 초라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치관이나 나이와 지위(위치)에 맞게 스스로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한다.

채우고 비우는 것은 일종의 삶의 순환이다.

채우는 것은 노력과 땀으로 채움이 좋고 비우는 것은 욕심일수록 좋을 것이다.

또한 가능하다면 채우는 것은 장점보다는 단점일수록 좋고, 비우는 것은 모자란 것보다는 남는 것일수록 좋다.

어쩌면 채우고 비우는 이 모두가 자신의 기준에 따른 선택이므로 무엇보다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렇기에 채우는 것보다 버리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든 법이다.

요즘 난 늘 비우기 위해 노력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공연히 고집스러워지고 융통성을 잃어 감을 느껴서다.

조금만 자존심을 굽히고 나이를 잊으면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너무 스스로 자신을 옥죄고 사는 것 같다.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현실 상황을 너무 나쁘게만 보는 나쁜 습성 탓이다.

모자라면 찾게 되고 찾게 되면 채워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듯 비움으로 인해 그 삶은 분명 더 충만해질 것이다.

나무도 계절이 차면 낙엽을 떨어뜨리고 사람도 해가지면 누울 곳을 찾기 마련이다.

아무리 절실했던 것도 그 용도를 다하면 소용없듯이 채우고 비우는 것 역시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즐기고 만족해하지 않으면, 그 삶은 언제나 과부하가 걸려 하루하루가 힘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도 평형이 맞아야 안전한 운항이 되는 것처럼, 채움과 비움으로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채우고 비움은 곧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사람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다.

그것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소중함이다.

스스로 원하거나 의도하지 않아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들은 하나둘 내 곁을 떠나가게 된다.

아파서 떠나고, 도움이 되지 않기에 떠나고, 자존심 때문에 떠나고, 상황이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떠난다.

일다시피 누군가 떠난 빈자리는 사연이나 추억이 남기에 남겨진 자는 언제나 외롭다.

그러므로 서로 함께 할 때 후회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함께 할 때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없다.

하고 싶은 말일지라도, 단 한마디의 말일지라도, 소중한 사람에게 하는 말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

서로 친해지기 위해 하는 다툼도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오히려 이별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인생이란 여정에서 누군가와의 만남은 그 자체로 이미 기연인 것이다.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나면 모든 만남이 내게 소중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사람의 만남이든, 대자연 만남이든, 아니면 사물의 만남이든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만남도 있을 것이고, 또 피해를 주는 만남도 있을 것이다.

이해관계가 생겨나듯 사연이나 추억도 생기고, 괴롭고 즐거운 일도 생기는 것처럼, 만남으로 인한 영향은 지대하다.

이처럼 서로를 변화시키니 그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가?

생각이나 욕망이 늘 변하는데 사람인들 그 어찌 그대로일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린 자신에게 소중한 것만큼은 언제까지나 그 때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스스로 그 변화에 맞춰 함께 변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변한 상대방만 탓하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것이 세상이기에, 생각이 다른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노라면, 원하지 않아도 변화는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삶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라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이기에, 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쩌면 사람에게 인연이 없으면 외로움조차 모를지도 모른다.

만남을 통해 감정이 생기고 쌓여서 슬픔이나 즐거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새로운 만남을 통해 하나둘 알아감으로써 희로애락도 함께 쌓여가는 것이다.

즐거움은 즐거움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인생이란 삶의 무대를 이루는 기초이며 줄기요, 잎이기에, 인연은 소중하다.

어쩌다 도심 거리에라도 거닐다보면 수많은 사람들과 마주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마치 사람들의 숲 속을 헤쳐 나가는 듯 막막한 느낌을 가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에서 스쳐나가듯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를 인연이라 하지는 않는다.

나와 서로 감정이 교류되거나 이해관계가 생기고, 삶의 어느 한 부분에서 서로 도움을 나눠야 그것이 인연인 것이다.

즉, 삶은 누군가와의 접점이 있어야 한다.

인생에 있어 사람만큼 소중한 존재란 없다.

그러므로 늘 측은지심을 갖고 나와 삶을 같이하는 사람들에 대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소중하게 여겨도 왜 그 사람들이 소중한지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진정한 소중함이 아니다.

알다시피 그 사람의 소중함은 삶의 고난을 통해 체득되는 것이다.

진정한 소중함은 모든 일에 우선할 수 있다.





사과는 우선순위가 필요 없다



사과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사과는 사람 사이의 정을 두텁게 하고 인간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잘못에 대한 사과를 마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사과가 무슨 용기인양 미화되기도 하지만, 진정한 사과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마음으로 인정할 때 가능하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잘못인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그 어찌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할 수 있겠는가?

사과는 가능하면 늦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과하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화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상황에서의 사과는 도리어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을 추스르고 마음의 안정을 찾아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 있을 때 사과하는 것이 좋다.

잘못은 늘 자신의 이익이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할 때 저지르기 쉬우므로 가급적 사후 점검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과에는 약하다.

사과뿐만 아니라 고마움에 대한 감사의 인사 역시 그렇다.

어쩌면 이 모두가 권위적인 가부장적 전통문화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보다 재력이나 힘이 강한 사람에게는 굴종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 낮추면서도,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사과는커녕 도리어 압박감을 느낄 정도의 더 강한 힘으로 해결하려고 든다.

사소한 잘못의 대부분은 자기 기분에 취할 때 저지르기 쉽다.

전혀 그런 뜻으로 말하거나 행동한 것이 아님에도, 자신의 느낌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나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것도, 공연히 트집을 잡거나 말꼬리를 잡게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늘 함께 있어, 상대방의 기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면 모를까, 대다수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에 대한 적절한 통제는,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시시때때로 상대방의 눈치를 보면서 사과를 남발해서도 안 되지만, 사과가 필요하게는 결코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누구의 잘못인지 서로는 분명하게 아는데, 상대방으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하면 왠지 화가 나기 마련이다.

침묵으로 시간만 흘러가면 해결될 것이란 생각보다는, 매듭을 풀려는 노력을 다함이 옳다.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신뢰가 무너짐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사귈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잊어라.

다소 과격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서로 헤어진 뒤, 어느 한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순간 그 인연도 끝이다.

쩌다 삶을 뒤돌아 다시 그 인연이 이어져도 예전과 같기를 기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억지스럽고 강요된 사과보다는, 진심 어린 용서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용서는 사과가 없어도 홀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별에도 결코 단절할 수 없는 이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난 소중함의 대명사 가족이다.

원만한 관계유지를 위해, 가족은 때로는 선제적인 사과나 잘못에 대한 분명한 지적도 필요하다.

이상스럽게 사람은 친분이 더 돈독할수록 감사나 사과보다는 이해와 용서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잘못에 대한 사과는 우선순위가 필요 없음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잘못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시간은 공평하다.

시간은 사람을 가리고 차별하지 않는다.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시간은 내편이지만,

스스로 할 수 없다 생각하고 원망이나 불평만 하기되면 시간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과 같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어렵고 복잡함은 있어도 끝없는 노력 앞에 넘어서지 못할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어렵다하여 생각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궁리(窮理)라는 말이 있다.

궁하면 통한다(窮則通) 라는 말처럼, 열심히 그 해결방법을 찾다보면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궁리는 머릿속으로 좋은 해결방법을 이리저리 따져보는 깊은 생각이다.

“할 수 없다”라던가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어떻게든 반드시 해결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쩌면 노력의 결과가 최선이 아닌 차선의 방법일지라도 말이다.

아닌 말로 아예 극복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단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그리워 죽을 것 같은 사랑도, 만나면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분노도,

친구의 유혹이나 거짓말에 넘어가 덤터기를 써야만 했던 일들도, 시간이 흐르면 그 모두가 부질없음을 알게 된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마찬가지다.

비록 해결이나 극복보다는 익숙함이 될지라도 말이다.

아마 결혼해서까지 연예시절의 사랑을 찾으면 행복한 결혼생활의 유지가 어렵고, 도움 받은 것보다 손해 본 것만 생각하면 영원한 우정을 기대할 수 없다.

문제의 원인은 늘 자신에게 더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 그동안 쌓인 불만이 어떤 계기로 은연 중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무 문제가 될 것도 아닌데, 공연히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일어날 때도 흔하다.

싸움이나 다툼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기 싫어 가급적이면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노력해도 말이다.

그러므로 불만이 있으면 어렵더라도 먼저 다가가 대화를 통해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가 된 뒤 후회해도 이미 늦다.

희소성은 바로 수요에 비해 공급의 부족함에서 생긴다.

이처럼 문제의 원인은 내 감정이 일반적이지 못함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희소성의 원칙에 반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람사이마다 흔하디흔하게 오고가는 것이 사랑이지만 이상하리만치 사랑은 사람 사람마다 특별하다.

아마 그것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듯, 원하고 바라는 사랑이 달라서일 것이다.

그것이 너무 많은 것은 귀해 보이지 않음에도 귀하게 보이는 이유다.

시간은 공평하다.

물론 문제의 원인에 대한 규명이 늦고 빠름은 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의 잘못이든 아니면 상대방의 잘못이든 대부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못하면 이런 시간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손해에 대해 만회할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시간에 맡기기보다는, 선제적으로 먼저 대응하고 그 규명은 나중으로 미뤄둘 필요가 있다.

때로는 잘잘못을 가릴 필요조차 무의미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함께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

무엇엔가 집중할 때는 모르다가 여유가 있으면 배고픈 것처럼 말이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말하고 웃고 보살피고 지켜주는 이 모든 일상이 그로 인해 생겨났음을 잊게 된다.

평소에는 곁에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사는 이런 일상이 바로 진정한 삶의 행복이다.

이렇듯 우린 즐거움과 웃음과 행복을 나누는 사람에게 마치 원수처럼 싸우려 달려드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자신의 상처로 돌아올 줄 알면서도 말이다.

특히 감정 문제일수록 그렇다.

잘못을 사과하고 오해를 푼다고 해서 가슴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까지 말끔히 사라지진 않는다.

말끔히 해소되기를 바라는 그것이 오히려 염치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먼저 말을 꺼내서 좋은 결과를 얻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참아서 더 좋을 경우도 있다.

가족이나 친구나 동료와 같이 삶을 나누는 사림일수록 한순간에 그 동안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이처럼 소중한 사람의 잘못은 가슴에 품어야 더 행복하다.

어쩌면 삶이란 생명을 유지하는 그 자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의지와 같은 정신적인 요소들이 함께해야 비로소 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유지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만족 역시 중요한 삶의 요소인 것이다.

자칫 단지 욕구의 충족을 위한 삶은 생기를 잃은 일상이 되기 쉽다.

축복된 삶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담는 작업이다.

의미가 있는 일은 바로 삶의 과정이기에 설령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도 후회를 남기지 않는다.

그 일이 힘들고 어려워도 어떻게든 이겨나가겠다는 도전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좌절이나 절망이 희망을 잃어서인 것처럼, 삶의 의미를 담는 일은 바로 그 희망을 살리는 지름길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가치를 이루고자 살아간다.

설령 다른 사람의 눈에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바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이루기 위해 경우에 따라 목숨마저 기꺼이 거는 것이다.

때로는 상황에 따라 그 가치가 변하기도 하지만 그 가치는 자신의 양심에 저촉되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가치라는 것은 극히 주관적이라 남의 인정이 불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의 가치가 남에게서 인정받았을 때 무엇보다 커다란 성취감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남으로부터 비아냥거림을 당한다면 그처럼 비참한 일도 없다.

따라서 가치가 의미를 가지려면 실천을 통한 검증이 필요하다.

자신의 사정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그 일을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가치나 의미는 바로 내가 부여하고 인정함으로써 생기는 것이기에 그에 대한 책임 역시 스스로의 몫인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된 삶은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이해관계가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사랑이니 우정이니 하면서도 은연중에 이해득실을 계산하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삶은 이해득실보다 마음이 시키는 것들이기 쉽다.

살면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진정으로 마음이 시키는 일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넉넉함이 필요하다.

남에게 보여줄 것이 없다고 실패한 삶은 아닐 것이다.

남들로부터 아무리 존경을 받아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면 그 삶은 결코 축복된 삶일 수없다.

영혼과 몸이 합쳐져야 비로소 한사람이 되듯이, 몸과 마음 모두가 만족해야 진정 축복된 삶이 아닐까 싶다.

따라서 항상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열심히 살다보면 뜻밖의 행운이나 아픔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것을 원래 그럴 운명이라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운명을 바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고 나쁨은 단지 현 상황에 비춰 그런 것이지 영원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가장 축복된 삶을 사는 사람이다.




무릎은 자존심이 아니라 나를 바르게 세우는 완충지일 뿐이다



남자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 용기가 있는 사람은 무릎을 꿇어야 할 때 꿇을 수 있는 사람이다.

무릎을 꿇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릎을 꿇음은 그 사람의 마음의 각오이며 다짐이다.

무릎조차 꿇지 못해 일평생 후회로 살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꿇는 무릎은 구애의 행동이고, 종교적으로는 신앙의 모습이다.

명절이나 망자에게 꿇는 무릎은 예절이며, 스스로에게 꿇는 무릎은 참회와 성찰의 얻기 위해서다.

때로는 본의 아니게 강제로 꿇을 때도 있지만, 무릎을 꿇는 행위는 단지 용서를 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용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출발임과 동시에 미래를 만들기 위한 나의 다짐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어야 무릎도 꿇을 수 있는 것이다.

무릎을 꿇어서 자존심이나 당당함이 사라진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숨기는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망치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하다.

무릎을 꿇음으로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소중한 가치를 지킬 수 있다면 주저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를 내려놓고 열린 마음을 가지면 주변 모두가 아름답게 보인다.

무릎은 자존심이 아니라 나를 바르게 세우는 완충지일 뿐이다.

잘못일수록 하루빨리 단절하는 것이 좋다.

스스로 잘못인지조차 몰랐다면 몰라도, 알면서 용서를 구하지 않는 행동은 비겁하다.

내 양심이 떳떳하지 못하면 왠지 하는 행동마다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러므로 무릎은 남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꿇어야 한다.

올곧은 나는 내가 세우는 것이다.




소통은 다른 사람을 알기 위한 나의 노력이다



독선은 특별한 게 아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마음의 병이다.

 인생에 있어 사람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자기 혼자 결론내리고 그에 반대하는 모든 것들은 부정하는 행동과 말이다.

자신의 결정이 마치 진리인양 착각하여 다른 주장이나 의견일랑 무시하는 것이다.

국어사전의 뜻처럼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열린 마음이나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 해서 생기는 것이다.

자신만이 옳다는 함정에 한번 빠지게 되면, 자신의 뜻에 지지와 성원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나,

혹여 다른 의견이나 반대를 하는 사람에게는, 경우에 따라서는 화나 분노를 넘어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한다.

자신에게 별다른 해가 돌아오지 않아도, 단지 자신의 뜻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실을 자신은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은 늘 억눌려 있다.

그리고 확고한 자신만의 세계가 있어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때로는 친분이 없는 사람들도 만나고 그래야하는데 항상 친한 사람만 만나려고 한다.

마음의 교류나 소통은, 나의 생각이나 입장이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알려는 노력인 것이다.

다수결의 원칙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의 이견에 따르른 것이 바로 공감일 것이다.

요즘 자기 위주로 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세상 돌아가는 거의 대부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굳이 나와 다른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어울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밖에서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벽안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다른 사람으로 인한 즐거움이나 만족을 모르기에 갈등을 겪기도 싫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다.

사람에 대해 모르고서는 잘못하면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기 쉽다.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한 가치 역시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비록 자신과 가치나 생각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설득하고 포용해나가야 한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다면 남보다 내가 먼저 다가가려 노력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자존감이 강해진다.

그래서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자기중심적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의 생각과 시야가 머무는 곳 모두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무 자신의 생각과 가치만 내세우면, 도리어 사람사이의 거리만 멀어질 뿐이다.

아무리 새로운 아이디어나 유머러스한 말솜씨도,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헛짓인 것이다.

독선은 지나친 욕심을 내려놓음으로써 버릴 수 있다.

생활할 수조차 없어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는  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사람도 많다.

욕심을 버리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고, 다가갈 수 있으며,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다.

자신을 갑이라 여기는 순간부터, 나 아닌 다른 사람은 늘 을이며 남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남으로 인해 귀해지는 것이다.





돌아봄은 후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다



사람은 욕망  어리인지도 모른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무엇인가를 끝임없이 탐한다.

남들 보기에는 부러울 만큼 가지고 있음에도 정작 당사자는 늘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낀다.

그래서 법정스님께서는 무소유의 삶을 강조하셨지만, 삶 그 자체가 돈인 현실에서 무소유를 실천은 지난한 일이다.

노력의 결과가 행복으로 돌아오지 않는 무소유는 의미가 되지 못한다.

우린 늘 일확천금을 꿈꾸며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설령 기대하거나 원하는 것이 없음에도, 남들보다 내게 그 행운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린 동전의 양면과 같은 세상의 이치를 곧잘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남들의 눈에 비치는, 화려하고 보기 좋은 것들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는 아예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진정한 행운은 자신이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것을 얻는 것이지, 누군가가 가져갈까봐 필요 없는 것까지 얻는 것은 아니다.

우린 늘 앞으로만 가려고 한다.

심지어 마치 누군가에 쫓기라도 하는 듯 온 힘을 다해 달려간다.

그러나 아무리 앞으로 달려가고 싶어도, 건강이나 경제적 능력이 따라가지 못하면 원치 않아도 멈출 수밖에 없다.

이런 스스로 능력치에 대한 자각은, 때때로 자괴감과 우울증과 같은 마음의 병을 가져다 준다.

비록 몸은 멈추었어도 마음마저 멈추지 못하다.

그래서 늙어갈수록 욕심이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며, 남에 대한 간섭이나 잔소리보다는, 칭찬과 감사와 고마움의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좋다.

시대나 환경이 달라졌음에도 스스로 변하지 못하고, 지난 삶의 경험만 주장함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지름길이다.

이처럼 몸과 마음의 외로움은, 남에게서가 아니라 내게서 시작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멈춰 버릴 것과 남겨둘 것을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욕망은 바닷물과 비슷하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모두가 어쩌면 욕망의 한 부분일 것이다.

늘 주위에 수없이 존재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면, 먹을수록 갈증을 더하는 바닷물에 불과하다.

남의 성공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탐하면 탐할수록 지옥 같은 고통만 더해질 것이다.

욕망이 크고 많을수록 인내와 고통 역시 배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때로는 시간을 내어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

자신을 비판하지도, 남과 비교하지도, 잘못을 찾지도, 무엇인가 선택하고 결정하지도 말고, 마음의 평온을 유지한 채 자신을 바라보자.

돌아보면 미련과 후회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자신이 이루어놓은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왠지 모르게 스스로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처럼,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다면 남들의 반응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동안 행복하게 살지 못했다면 지금부터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너무 행복과 불행이란 이분법으로 나누기보다는, 행복의 파이가 커지도록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돌아봄은 후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야 한다.



령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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