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의 거리는 마음이 만든 거리일 뿐이다



말(言)은 대부분 나를 향해서 하지 않는다



옳음은 정의로워야 하는데 다 그렇지만 않은 것이 세상이다.

그래서 옳은 말보다는 힘을 가진 사람이나 다수의 의견이 더 지지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여론정치>라는 말도, 결국 옳음보다는 다수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듯이,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소위 통찰력과 힘을 겸비한 지도자의 강한 리더십과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솔직히 모든 사람이 우리가 살아갈 미래에 대해 고민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국가나 사회는 물론 사람이 모인 어느 단체든 그 단체를 이끌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서민은 그저 옳음을 지향하여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면 그만이다.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 중에 <서울도 안가 본 사람이 서울에 대해서는 더 잘 안다.>라는 말이 있다.

일반 서민은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지도자라면 진실을 바탕으로 하여 미래의 발전까지 고려하여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경험과 지혜는 사람을 강하게 하지만 돈은 사람의 약하게 한다.

물론 돈을 이미 소유하고 있을 때는 힘이 되지만, 돈을 쫒게 되는 순간부터 오히려 사람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돈은 거의 만능의 힘을 맹신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떳떳함을 잃고 불행과 이웃하여 살기 쉽다.

지도층과 힘을 가진 자들이 돈을 탐하면 그 사회의 질서는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도자일수록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저 사람, 어릴 적에는 안 그랬는데 이상하게 변했네,>하는 말도 곧잘 한다.

물론 모든 만물은 시산이 흐르면 변해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예의나 옳고 그름조차 헤아리지 못하면 곤란하다.

“똥 누러 갈 때 다르고 똥 눈 뒤에 다르다.”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변화 역시 허용범위가 있는 것이다.

옳은 일이나 말은 결국 이런 불합한 관행들과의 싸움이기에 적이 생김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이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선한 얼굴 뒤에 숨어서 하는 악행이다.

운전하고 가다 트레일러와 같은 대형차를 만나면 알아서 미리 비켜주는 것이 좋듯이,

인적이 사라진 길에서 얼굴이 험하고 덩치가 큰 사람을 보면 공연히 움츠려들어 피하게 된다.

그러나 선량한 모습을 한 채 눈에 보이지 않는 악행을 할 경우 경계심을 느끼지 않기에 쉽게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옳은 일이나 말일수록 가급적 육하원칙이나 기승전결에 따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여러 면에서 옳다.

모든 사람이 <Yes>라고 할 때 <No>라고 하는 것을 용기라고 여기지 말라.

그것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용기가 아니라 아집이요 독선에 불과하기 쉽다.

내가 <No>라고 외치는 순간은, 불의에 맞서거나 공평하지 않게 손해를 볼 때이지, 정당한 것을 부정할 때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상대방의 견해를 무시하거나 듣고 그 의견을 반영하지 못하는 행동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의 근본인 소통을 모르는 행동이다.

생각은 냉정하게 하고 행동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말은 대부분 나를 향해서 하지 않는다.

나를 향할 때 마음으로 생각으로 하는 것처럼, 옳은 것일수록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그리고 옳음을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일반적인 다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라,

나를 기준으로 하면 옳음보다는 독선으로 변질될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말(言)이 항상 몸을 끌고 갈 수 있도록 하라.




감사와 사과는 곧 상대방을 향한 나의 다가섬이다



요즘 뭔가 모르게 혼자 붕 떠  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분명 집에 돌아가면 가족이 있고 직장에는 동료들이 있음에도 혼자가 된 기분이다.

그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난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른 사람을 스스로 마음에서 갈라놓고 있어서일 게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주는 이득 때문에 어쩔 수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으로 결코 편안함이나 행복이 구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때로는 자신에게조차 귀찮고 불편할 때가 있는데, 타인으로 인한 불편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불편함도 넘기지 못하면서 타인과 삶을 공유하려는 마음은 자기중심적 사고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늘 사용하는 물건이 아닌 늘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라면 특히 그렇다.

스스로 행복 하고 싶다면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대방이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행복 하고 싶다면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한다.

편견은 자신의 가치나 생각으로 어떤 사람을 판단하고 결론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편견은 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에 불과하다.

함께 라는 것은 삶뿐만 아니라 가치나 생각을 서로 공유하고 수용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행복은 서로 함께할 때 배가됨을 기억해야 한다.

기억이란 놈은 반복하여 쓰지 않으면 슬며시 사라진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기억력이 뛰어나도 시간보다 더 뛰어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미 알고 있더라도, 함께 했던 기억을 함께 자주 추억해야, 서로를 향한 정도 더 깊어지는 법이다.

나쁜 일이 생기면 좋았던 순간을,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상황이 더 깊고 길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의 상실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기억에서 사라져도 잊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대자연처럼 조석지변 한다.

아침에 볼 때 다르고 점심때 다르고 저녁에 다르다.

웃을 때 표정이 다르고 화를 내거나 슬픔에 젖어있을 때의 표정도 다르다.

그리고 더 다른 것은 품성이나 인품, 또는 성격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바라보는 그 순간의 나의 심리상태다.

즉, 나의 기분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상대방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곁 모습보다, 평소 일상을 통해 내게 보여줬던 것들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다해야 한다.

지금 화를 내고 토라지고 외면하는 것도, 상대방이 아닌 나의 잘못에 기인한 것인지 말이다.

혹여 나의 잘못이라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먼저 사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잘못의 경중을 따지는 것은 그 다음이어야 한다.

감사와 사과는 곧 상대방을 향한 나의 다가섬이다.

때로는 잠든 아내나 아이들의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라.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도 볼 수 있지만, 아마 찡그리고 웅크린 모습도 많이 볼 것이다.

이처럼 나의 소중한 가족은, 바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잠자는 모습조차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행복이 가족의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공감을 통해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나를 비롯한 주변이 행복해야, 그 행복 역시 오래도록 유지될 것이다.




너 때문이 아닌 바로 나 때문



다 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다 버려야만 비로소 남는 것도 있다.

그것은 그동안 나와 삶을 해 준 사람들에 대한 정이다.

간섭이 싫어서,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외면하고, 때로는 원망과 미움에 멀리했을지라도, 세월이 쌓은 정은 결코없어지지 않는다.

나무가 타고 타서 백탄이란 최고의 숯이 되듯이, 다 버리고 나면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 바로 정이란 놈이다.

사람이 혼자 살 수 없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고 싶어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작은 간섭에도 불편해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러한 간섭과 잔소리가 있어 진정으로 행복했음을 알 수 있다.

큰 것은 소소한 작은 것들이 쌓여야만 얻어지는 것이고, 경험은 극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늙어갈수록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정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삶이란 다 어느 정도 불편한 점을 껴안고 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 좋음 뒤에는 나쁨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필요하고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있으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은 모자람이 있어나 그 빛이 나는 법이다.

행복은 어려움의 극복을 통해 얻어지며, 즐거움은 사람이나 물질과 같은 상대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불편함이 없는 삶은 이미 삶이 아닐 것이다.

“너 때문에”인 것은 결코 없다.

때로는 네가 원인이 되어 손해를 보거나 삶이 비틀어졌을지라도, 거기에는 어쨌거나 은연 중 나의 방관이나 뜻이 곁들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행복과 즐거움은 남을 통해서 얻음이 더 크고, 불행과 고통은 나를 통해 더 많이 느끼는 법이다.

이익이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소중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사람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은 다름 아닌 정이다.

정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과 미움이 시간과 더해져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되어 가슴에 남겨지는 게 바로 정이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이해하고 믿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한다.

자신이 진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어린 시절 안아주고 보듬어 주고 쓰다듬어 주던 어머님의 손길을 그 어찌 잊으랴?

혹여 넘어질세라 잡아주고 힘들세라 말없이 용기를 북돋아 주시던 아버지의 그 등을 어찌 잊으랴?

언제부터인가 내 아내 내 자식 챙기느라 슬며시 놓아버린 그 손길조차 늘 나를 향해 있었음을 어찌 모를까?

애써 외면하고 살았던 그 모두가 내 욕심이 만든 장벽이었음을 말이다.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란 말이 있다.

소중한 사람끼리 미움과 원망이란 틈이 생길수록 무엇보다 함께하려는 노력부터 먼저해야 한다.

서로 싸우고 토라지고 상처를 주더라도 함께 있노라면 금방 갈등이 해소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멀리하고 말하지 않을수록 답답한 건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위기를 겪지 않는 정은 모래성과 한 치 다를 바 없듯, “너 때문이 아닌 바로 나 때문”임을 기억하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경치는 눈에 편한 경치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악은 귀에 편한 음악이고,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음식은 입에 편한 음식인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은 마음에 편한 사람이다.

단 하루를 살아도 마음에 편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좋아하는 감정은 보는 것으로 느끼고, 사랑의 감정은 마음으로 느낀다.

그리움은 이별로 알고, 행복은 슬픔으로 알고, 삶은 죽음으로 알고, 소중함은 부족함으로 안다.

내게 넘치는 것도, 내게 부족한 것도, 내 마음이 전하는 감정의 산물일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아이는 어머니를 좋아하며, 부자는 돈을 좋아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도 내 마음에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도 내 마음에 있다.

진정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다.




성공의 심리



대부분 사람들이 성공이 바로 정상이라는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성공만 하면 무슨 일이든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며 생각한다.

하지만 성공은 커다란 것만이 아니라 일상의 가사에서 하게 되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사소한 것에서 성취감을 잘 느끼지 못하기에 성공이란 여기기 않지만, 진정한 행복은 이런 일상에서 얻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성공은 남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리란 참으로 오묘하고 복잡하다.

자유를 원하면서 사랑에는 구속되기를 원하고, 진실하게 살고 싶어 하면서 많은 돈을 벌기를 원한다.

혼자 유유자적하고 싶어 산을 찾았음에도 정작 산에서도 이런저런 걱정을 내려놓지 못한다.

차고 넘치는 것보다 조금은 부족한 것이 오히려 더 삶에 생명력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목적보다 수단으로 사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성공의 가치 역시 수치로 계산하거나 무게로 계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이 진정한 성공인지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남들에 의해 아니면 자신에 의해<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의 인정에 의해 증명되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성공의 가치는 물질이라기보다 충족된 마음일 것이다.

따라서 일상에서의 가치가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때로는 특별하게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지 않아도 그렇다.

그래서 일상의 생각이나 생활 역시 개별적이면서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가치관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주도하며 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성공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해도, 이따금 생각지도 못하는 시련에 의해, 다른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생이다.

어쩌면 꼭 최고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고를 고집하는 것은 경쟁심이나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다.

하지만 높은 봉우리나 키가 큰 나무일수록 거센 바람을 견뎌야 하듯이, 정상이란 자리는 더 많은 시련으로부터 견뎌야 한다.

그렇기에 정상이란 최고를 성공이라는 생각하기보다는 누군가와 더불어 사는 행복에 가치를 두는 것이 좋다.

성공하여 혼자 행복하기보다는 내가 조금 덜 행복하더라도 모두가 행복한 것이 정답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딛고 이룬 성공은 이미 성공이 아니다.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불행하다면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엔 그저 맛있는 것을 먹음으로 행복했기에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살아가면서 어려울 때 도움을 나누는 사람들은, 대부분 큰 부자보다 같은 처지에 놓인 주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공든 탑을 쌓듯 작은 꿈들을 하나하나 실현해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흔히 사람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고들 한다.

그러나 기회는 언제나 성공이란 가치 위에 위험성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즉,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 안에 실패라는 쓰디쓴 독즙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이 가져다 줄 이익이나 즐거움에 취해 자칫 흐트러지면, 어느 순간 실패의 질곡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한 성공이란 애당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마음이 만든 거리일 뿐이다



흔히 부부를 무촌이라고 한다.

부자사이는 1촌, 형제자매는 2촌이다.

이와 같이 가족이 늘어감에 따라 촌수가 멀어지고, 이 멀어짐만큼 만나는 횟수도 대부분 줄어들기 마련이다.

물론 터전이나 직장에 따라 이웃하고 살면 부모나 형제자매보다 더 자주 만나게 되겠지만,

일반적으로 촌수가 멀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사이의 거리도 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은 통상적인 혈족에 대한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관점에 따라 그 거리가 달라진다.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 스스로 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웃사촌이 먼 친척보다 좋다는 격언은, 서로 같은 환경에 처해 있기에 같은 흐름을 탈 수 있어서이다.

거기에다 목표로 하는 지향점이 같다면 아마 금상첨화일 것이다.

자연스럽게 서로 동조되어 같이 호흡할 수 있게 된다.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우선으로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의 생각이나 가치관, 그리고 인생의 목표나 지향점은 어딘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혹여 장단점은 무엇인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동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야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늘 변함없이 반복되어야 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명언처럼, 소중한 사람일수록 지근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눈에서 마음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관심과 사랑을 기울려야 한다.

동물도 주인을 알아보듯이 진심으로 다가서면 싫어할 사람 없다.

주변의 평가나 선입견을 갖지 말고 내 눈으로 보고 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의 진의를 느낄 수 없다.

사람사이의 거리는 대부분 상대방보다 나에 의해서 멀어진다.

나의 가치와 생각에 따라, 혹은 작은 이익에 흔들려 멀리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행운은 위기와 같이 오듯이, 사람사이도 손익이 함께 상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진정으로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손해본 것만 야속하고 그동안 받은 도움이나 이익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부분 나의 질투와 욕망에서 그 싹이 잉태되고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벽을 허무는 당사자 역시 남이 아닌 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사이의 거리도 나와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과는 서로를 가로막을 장애도 벽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내가 만든 마음의 거리이기 쉽다.

대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다.

즉,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소중하다 사랑한다 하는 들리지 않는 마음의 말보다, 진심을 다한 한마디 말이 더 힘 있고 용기가 필요한 말이다.

잘못된 것에는 진심 어린 사과나 용서를 구하고, 좋은 것에는 정성으로 칭찬과 감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속 진심들이 그저 마음 안에서만 곁돌아선 곤란하다.

눈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라고 한다.

그러므로 스포츠나 여행, 모임이나 취미를 통해 함께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너무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사 생각하라.

내가 행복해서 상대가 행복한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이 행복함으로써 나 역시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거리가 곧 사람의 거리임을 잊지 말라.





세상사 모두는 제가 하기 나름이다



<할 것>이 계획이라면, <한 것>은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할 것>은 미래지만, <한 것>은 이미 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할 것>은 앞으로 하겠다는 약속과 다를 바 없지만, <한 것>은 행위의 결과이며 책임이 따른다.

그러므로 계획으로 있는 것과 이미 행동으로 옮겨 실천한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아무리 그럴싸한 계획일지라도 그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면, 그것은 일이나 사람 어느 것에도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언변만 화려하고 그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왠지 모르게 가볍게 보이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할 것>이 꽃이라면 <한 것>은 열매일 것이다.

그만큼 <할 것>도 중요하지만, <할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도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한 것>은 계획을 뛰어 넘어, 땀과 의지와 노력이 서로 유기적이고 조화로워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계획으로 평가받기보다는 일의 결과로 평가받는 것이기에 그렇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어떤 사람도 자신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싶은 사람이 없다.

다만 이미 주어진 열악한 환경을 뛰어넘기 위해, 절망하고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배워가는 과정에 있는 젊은 시절에는 <할 것>이 <한 것>보다 많을 것이고, 배움을 적용하는 청장년 시절에는 <한 것>이 점차 증가하다가, 노년에는 <한 것>을 후회 없도록 정리해야 할 것이다.

행복해서 슬퍼서 인생이 잘못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할 것>을 하지 못t해서 인생이 꼬이는 경우는 지극히 많다.

사람이 바른 말 좀 하고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항상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옳고 그름이 뒤 바뀌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에 있어서는 <할 것>이 <한 것>으로 구체화되지 않고서는, 내 삶에 대한 의미가 될 수 없음은 변함이 없다.

나는 항상 <한 것>이 <할 것>보다 부족한 사람이다.

정말 <한 것>이 <할 것>에 비해 많았으면 싶지만, 되돌아보면 <할 것>은 거의 용두사미로 끝난 게 대부분이다.

돌이켜보면 심히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쉽게 만족하지 못하는 성격 탓일 것이다.

세상사 모두는 제가 하기 나름인데 저 혼자 걱정만 붙잡고 살아 온 것이다.

어쩌면 삶에 떠밀려 살아 온 반증일 것이다.

이름이 되고 얼굴이 되고 또 그것들이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할 것>이라는 행위를 통해 구체화되어야 한다.

하나의 돌을 놓으면 그저 하나의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그 돌 위에 하나씩 수많은 돌이 놓이면 탑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돌 위에 돌을 얹히기 위한 고이고 다듬는 수없는 작업이 바로 삶이다.

어떤 사람은 단 한번의 수고로 탑을 쌓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기에 어느 누구에게라도 당당해야 한다.




나뭇가지



나뭇가지는 작은 바람결에도 흔들린다.

그렇게 흔들리는 이유는 스스로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다.

가지가 우거지고 잎이 무성하다고 해서 그 나무가 건강한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뿌리 채 뽑혀질 수도 있고, 온몸에 상처를 입고 오랫동안 고통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나무도 근본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듯이,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자람뿐만 아니라 넘치는 것도 덜어낼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떨어져야 먼저 시작할 수 있다.

꽃잎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히고, 열매가 떨어져야 새싹을 만들 듯이, 만물은 죽음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

어쩌면 불교의 윤회는 탄생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죽음이든 다 슬프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아니 조물주의 영역인 것이다.

이처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지는 법이다.

먼저 포기하지 말라.

절망과 좌절해서는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다.

어떤 어려움도 근본이 흔들리지 않은 다음에야 도움도 가능하다.

때로는 옆에서 부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곁에 누군가가 있을 때나 가능한 법이다.

비록 인생에 옹이가 생길지라도, 어렵고 힘들수록 마음이나 몸이 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결의를 굳건히 해야 한다.

내가 먼저 이끌어라.

머물고 싶어도 시간은 멈춤이 없다.

자신이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당신이 원하는 것을 알 수 없다.

기쁘고 행복한 순간도 나의 인생이지만, 슬프고 불행한 순간도 나의 인생임을 잊지 말라.

일순간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넓게 보고 크게 보려는 마음을 가져야, 자신의 선택과 능력을 믿을 수 있는 법이다.

목이 말라서 우물을 찾지 말고, 미리미리 목을 축이는 습관을 가져라.

목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미련한 짓일 뿐, 인내라든가 시기나 기회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아서는 그 우물에 남아 있는 물조차, 이미 더 약삭빠른 누군가에 의해 사라진 뒤일 것이다.

미리 대비하지 못하면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정작 선택의 기회조차 상실할 수 있다.

내 몫은 내가 챙겨야 위기와 어려움은 비켜간다.

나의 인연은 내가 만들어라.

남으로부터 시작된 인연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어려운 사람일수록 차일피일 미루기보다는 바로 찾아가고, 친한 사람일수록 그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간관계의 출발점은 모두가 내가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나를 중심축으로 하는 인간관계일수록 오래가고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는다.

나의 선택을 필연이 되게 하라.

그러기 위해서 선택받기보다 선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이든 사람이든, 도와주는 사람보다 주도적인 사람이 될 때, 사람은 더 행복하고 더 즐거운 법이다.

그러므로 내가 선택했을지라도, 선택받은 사람이 옳은 선택임을 믿을 수 있도록,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선택받은 사람의 후회는, 곧 나의 실패와 운명과 직결됨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되지 말라.

스스로 불쌍하다 생각하면 불쌍하지 않아도 불쌍한 법이고, 스스로 고귀하다 여기면 고귀하지 않아도 고귀한 법이다.

내 눈을 보이는 것만 믿으면, 진실이란 언제나 내 시각에 머물 뿐,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나를 내려놓음은 삶을 내려놓음이 아니라 욕심과 이해로 부터 자유로워짐이라.

늘 타인이 내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소통의 끈을 놓지 말라.




오해할수록 외로움만 깊어진다



모든 세상의 화(禍)는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처럼 세상의 온갖 기준이나 가치, 그리고 오해와 이해 역시 나로 인해 생기고 소멸되는 것이다.

어쩌면 오해로 대변되는 나쁜 것들과, 이해로 대변되는 좋은 것들은 나의 관점에서인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세상이나 상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첫눈에 반했다든가, 한번 마음에 든 사람일수록 놓아버리기도 쉽지 않다.

독일이 낳은 시인 괴테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는 끼울 구멍이 없어진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 시작이 중요성이요, 둘째는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작은 반>이라든가 <천리 길도 한걸음 부터>라는 격언들도 전해진다.

그 모두 시작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명언들이다.

오해나 이해 역시 첫 만남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 의사소통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답답함을 느낄 때는 의사소통이 잘 안 될 경우이다.

서로 대화는 하고 있으면서도 왠지 벽보고 얘기하는 기분이 들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대화는 상대가 있는 것이기에 대화의 주제나 관심사가 서로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은 고민이나 어려움을 들어 달라고 하는데, 경청보다는 오히려 충고나 조언과 같은 자기말만 해서는 안 된다.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잘못된 소통에서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

물론 서로에 대한 믿음이란 두께가 얇아진 탓이기도 하지만, 듣는 사람의 주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자보다 제3자의 이해관계가 더 크고 중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또는 제3자의 의도가 개입되어 잘못 전달될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람에 대한 편견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해할수록 외로움만 깊어질 뿐이다.





믿음, 그 위에서



사람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아는 게 있다.

그것은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 혹은 싫어하는지 아는 것이다.

어쩌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일지 모르지만 바로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유익한 사람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배신이나 사기와 같은 손해를 보는 것은 이익이라는 흑막이 그 진실의 눈을 가리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은 마음에서 비롯되고 신용은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다.

정을 교류할 때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돈과 같은 재물을 교류할 때는 주변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정이 약해서가 아니라 잘못하면 재물과 사람을 다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족이나 친구일 경우 되돌려 받으려는 마음에 앞서 그냥 준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그래서 나쁘고 위험한 것일수록 소중한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 법이다.

흔히 하는 말 중 돈이 사람을 속인다는 말이 있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는 격언처럼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인식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한도를 정해야 하겠지만 돈은 지킬 능력만큼 가지는 것이 현명하다

여유도 좋지만 분에 넘치면 오히려 자신을 헤치는 요물로 변하기 쉽다.

그래서 그 돈을 삶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는 것도 때가 있다.

아마 그 순간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경험이 쌓였을 때다.

나름대로 성공과 실패의 경험이 누적되어 미래에 대한 판단이 어느 정도 눈에 보일 때나 가능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좌절이고 포기라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어느 누구나 스스로에 대한 냉정한 판단과 성찰 없이는 욕심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다.

삶은 늘 자신에 대한 갈등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일지라도, 상황이나 경우에 따라 믿음의 정도가 다라질 수밖에 없음은 불문가지다.

그렇기에 믿음도 마음이란 요물이 만드는 일종의 갈등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맞게 소중한 사람의 마음이 다치지 않게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차라리 상대방이 액션을 취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믿음은 새로운 변화를 통해 시험받는다.

요즘 탤런트 김보성이나 개그우먼 김국주에 의해 유행하는 의리의 한 단면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간직한 소중한 사람일수록 배려와 이해 그리고 희생을 통해 믿음을 지키는 성숙한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내게 화를 내고 잔소리하는 사람일수록 소중히 해야 한다.

참고 인내하는 것 역시 믿음으로 가능하니까 말이다.

사람은 늘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서 남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남을 알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상대방 편에 서려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믿음을 얻기란 어렵다.

내 눈이 아닌 상대방의 눈으로, 내 마음이 아닌 상대방의 마음으로 나를 봐야 진정한 나를 알 수 있으며, 상대방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터, 그것이 바로 진정 상대방으로부터 믿음을 얻는 길이다.

상대방으로부터의 믿음에 대한 확인은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

믿음에 대한 확인은 상대방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흔들림에 대한 자각일 뿐이다.

마음으로 믿지 못하면 함께해 온 지난 세월 소중한 시간이 무슨 소용 있으랴.

의심은 상대방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허약함에서 비롯됨으로,

자신의 마음부터 먼저 단속함이 옳으며,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마음이 만든 거리일 뿐이다.



령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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