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깊을수록 그 상처 역시 깊다


의지력을 가진 용기일수록 오래간다



사람이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두 가지는 반드시 받아들어야 한다.

그 하나는 내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올바른 것 즉 정의로운 것이다.

앞뒤를 분간 못하고 쓸데없이 남을 탓하거나 자존심, 또는 욕망에 이끌려 도움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올바른 가치를 지키는 것은 바로 내 삶의 근간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나 핑계로도 외면해서는 곤란하다.

지켜야 할 것조차 지키지 않는 삶은 살아도 사람으로서의 삶이라 할 수 없다.

나를 숙이는 마음이야 말로 진정한 용기다.

진정한 용기일수록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의 삶의 과정을 통해 얻어진 지식과 경험들에 의해 걸려지고 다듬어져 의지를 지녀야 한다.

그렇기에 용기가 작심삼일로 끝나기 보다는 계획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어야 한다.

재충전을 통해 끊임없이 용기를 북돋아 지속력을 키워야 한다.

예측할 수 없거나 막연한 일에 도전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한겨울에 꽁꽁 언 얼음을 녹이겠다고 난로를 피우기보다는 봄을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하다.

스스로에게는 얼마간의 불이익이 오더라도 기꺼이 옳음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일 것이다.

이처럼 용기는 이루기가 어렵고 힘들며 고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그 길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도전정신이다.

지금 상황이 불리하다고 다른 해결방안조차 찾아보지 않고 지레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용기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용기는 자신감의 발로(發露)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이나 성격 그리고 믿음은 물론 인간관계나 정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스스로를 과신하여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보다는 주변의 것들을 활용할 줄 아는 것도 용기다.

그리고 한번 도전해보고 어려우면 피하기보다는 극복해가는 일련의 과정이다.

용기는 특별한 사람만 내는 것이 아니다.

용기는 힘 좋은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닌,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갖는 일상의 생활태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필요할 때 내기 위해서는 평소에도 마음의 훈련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기준이 아닌 사회통념에 맞는 정의감이라든가, 합리적인 이성과 판단력, 그리고 두려움에 맞서는 근성을 키워야 한다.

용기는 불의에 맞서서 싸우는 것보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증명하는 일련의 행위다.

용기(勇氣)는 한순간일 뿐, 지속적이지 않다.

그렇기에 대부분 일들은 작심삼일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만일 용기가 한순간에 그치지 않고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면 실패나 좌절이란 결코 없을 것이다.

예상하지 못했던 계획과 어긋나는 일이 닥쳐도, 용기가 지속된다면 불굴의 의지로 그 일조차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치 앞도 가름할 수 없는 것이 운명이듯, 미래에 대한 확신보다는 현실에 가치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삶에 있어 그림자는 없다



세상 어떤 사람도 그림자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또 어떤 사람도 그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사람도 없다.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고, 또 어느 누군가와의 인연이 되어 소중한 사람이 생기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의 그림자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지켜야하는 소중한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림자로 살아가야 하는 삶은 늘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보다는 그 사람이 더 잘 되고 빛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림자로 살아가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더 이롭고 아름다운 삶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행복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내 삶이라는 인정보다는 희생한다는 전제를 갖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주변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정상에 서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정상에 섰다 한들 그 어찌 행복하겠는가?

알다시피 정상은 누구나 설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설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또한 평생을 노력해도 올바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면 정상에 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이 선택한 길이 정상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길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어쩌면 운명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 나름대로 소명이 있다.

즉,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다.

소명은 바로 그 시각 그 상황에서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비록 삶은 그림자로 살지라도 스스로의 가치를 낮출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림자가 있어 사람인 것처럼, 성공 뒤에는 그 성공을 지탱해줄 땀과 노력이라는 희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건 부당한 방법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성취했을 때다.

그림자는 단지 빛의 산물일 뿐이다.

스스로 삶을 그림자로 여길수록 그림자가 만든 어둠에 녹아들 수밖에 없다.

내가 그 누군가의 빛 뒤에 존재하는 것처럼, 내 뒤에도 나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또 다른 그림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빛은 어둠이 있어 더욱더 빛나듯, 비록 그림자일지라도 그 속에는 빛도 존재함을 깨달아야 한다.

빛과 그림자는 단지 그 사람의 일일 뿐, 삶의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내 삶일지라도 혼자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구 밑에 살고 누구에게 덕을 보며 산다는 생각일랑 버려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이 있어야 존재하고, 부자는 가난한 자로 인해 대접받고, 남자는 여자가 있어 성적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가 있어야 그 가치가 더 빛나기에 지나친 자존감에 대한 비하는 불필요하다.

그림자 인생이기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림자 인생이기에 행복하다고 믿어라.

“불평하는 사람이 늘 불평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식견이 높아 정당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일 수 있지만 그것 조차 습관으로 변질될 수 있음이다.

무슨 일이든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알아야 스스로의 삶 역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빛이든 그림자든 상황이 만드는 것이지 삶에 있어서 그림자란 없다.

스스로 그림자로 살지 않는 한 말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평등은 무게나 수량이 아닌 가치여야 한다



평등이란 사람은 다 똑같다는 전제가 있는 말이기에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람은 이름이 다른 만큼 얼굴이나 모습, 성격이나 가치관이 다르다.

게으른 사람이 있는 반면 부지런한 사람도 있고, 이기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 배려할 줄 아는 사람도 있다.

평생 동안 고생 없이 노력 없어도 편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매일매일 고통과 땀속에 살아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불평등때문에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지 모른다.

평등은 신분이나 권리 또는 의무에 있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은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평등은 높은 자리에서 바라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낮은 자리에 임해 바라보면 극명하게 알 수 있다.

이처럼 평등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낮추고 낮은 곳에서 그들의 삶과 일상을 살피고 경험해야 볼 수 있는 것이다.

높은 곳에 앉아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평등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에서 바라봐선 안 된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재산이나 지식정도에 맞은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일반적으로 편협함은, 나와는 다른 타인의 생각이나 견해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평등함보다 상대방의 평등함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들로부터 은근히 인정받는 사람이 있다.

바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공정하게 헤아리고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과 함께 공존했다가 관계가 끝나면 서서히 사라지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윗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아랫사람으로, 또 어떤 사람은 동료가 되지만, 그 누구도 그냥 지나가는 법은 없다.

혹자는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고, 또 혹자는 플러스로 작용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관계를 맺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자유롭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이나 친구 동료, 또는 상하의 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사람들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고 또 이익과 손해를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의 관계는 상대방이 아무리 공정하게 처신해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늘 손해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받는 입장에서보다, 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처신하는 긍정의 마인드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가치관이다.

가치관은 그 사람이 갖는 어떤 사물에 대한 견해나 입장을 일컫는 말이다.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사람은 은연중에 이런 가치관에 의해 자연스럽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하다거나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바로 누군가에게서 자신의 가치관을 인정받았을 때일 것이다.

그만큼 가치관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평등이라 함은, 능력의 차이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분배의 개념이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마다의 가치관이 다르기에, 가치에 맞는 공정한 분배는 사실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관계에서의 평등은, 일방적인 주장이나 요구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시각이며 배려일 것이다.

즉, 평등은 수량이나 무게가 아닌 가치의 균형이어야 한다.





걱정은 일종의 예방주사인 것이다



시간이란 걸음의 간격은 항상 일정하다.

비록 그 걸음걸이는 일정하나 그 걸음 자체는 이미 변화다.

그러므로 무엇을 배우고 익히기 위한 노력보다 자신을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자연스럽게 성장과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걱정도 일종의 변화를 위한 자기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지나보면 어떻게 살지에 대한 삶의 방식은 이미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후천적인 배움이나 경험을 통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이러한 태생적인 단점들은 소위 운명이나 숙명이란 이름으로 늘 나에게 따라붙는 것이다.

걱정은 이렇게 원하는 것들을, 자신의 생각대로 사람이 어떤 일이나 대상(對象)을 제 마음대로 처리 못하는 데에서 오는, 일종의 마음의 병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라면 바라는 3가지 욕망이 있는데, 그것은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권력만 쥐면 돈이나 명예는 따라온다고 했지만, 요즘은 돈만 있으면 명예나 권력도 저절로 따라온다.

그만큼 요즘은 돈이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순리대로의 삶이 어리석음으로, 보여줄 수 있지만, 인생이란 결국 자의적인 만족의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그 삶은 정답일 수 없다.

그러나 요즘처럼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말이 딱 들어 맞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성을 내고, 부정한 방법으로 돈과 권력을 움켜쥔 사람이 대우받으며,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지키는 사람에게 도리어 호통을 치는 웃지 못 할 상황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쉽게 말해서, 그동안 도덕적인 양심을 지킴으로 얻었던 행복조차도, 돈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까지 이른 것이다.

그렇게 각종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가치관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뤄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하루의 변화가 너무 극심하다보니, 목표를 세우기조차 힘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니 미처 정신 차릴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고 변화의 홍수 속으로 떠밀려 가는 형국이다.

그만큼 요즘은 기회가 여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을 뜨고 뻔히 보면서도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흔히들 순리대로 살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금 자신이 처한 환경이 아무리 힘들어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란 한없이 더디게 가지만, 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화살처럼 빨리 다가온다.

하루하루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바쁘게 살아온 듯하지만, 막상 그 시간이 지나가면 문득 그 순간을 추억하게 된다.

결국 스스로의 양심에 거슬리지 않는 삶이 바로 걱정없이 사는 것이다.

마음에 걱정이 생기는 이유는 스스로 믿지 못해서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없는 부정적인 마음의 고백이다.

이처럼 걱정은 행동하기에 앞서 해야 할 일에 대한 염려이기에 먼저 용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

사람은 걱정거리가 있어야 스스로 성장하고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걱정은 일종의 예방주사인 것이다.




생각이 깊을수록 그 상처 역시 깊다



사람은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때 가장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자신의 삶과 관련된 수많은 잔상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다 지나치면 자신이 하고 않아도 될 것까지 마치 혼자의 책임인 양 몰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생각을 만들다 보면 때로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까지 내몰릴 때도 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생각이 깊어질수록 독선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생각은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위주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하여야 한다.

행복한 사람은 주어진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불행한 사람은 주어진 상황들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생각은 비록 내 안에 존재 하지만 그로 인해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자신을 좋지않는 방향으로 몰아갈수록 불행의 늪은 깊고도 넓다.

내 마음이 편안하면 주변 모두가 원만해지고, 내 마음이 어지러우면 주변 모두가 험악해진다.

마음이 유연하지 못하면 별 것도 아닌 일에 자존심을 걸게 된다.

사소한 일마다 자존심을 내세우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어울릴 수 없다.

생각하는 것도 사는 것도 그 모두 나의 위주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마음으로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해 가슴에 남겨진 앙금이 바로 마음의 상처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생각이 마음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곤란하다.

싫든 좋든 모든 일의 결과는 실천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나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세상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잡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불행하지 않는 지름길이다.

함께라는 의미는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도 포함하는 말이다.

누구를 위하고 누구에게 잘 하려는 마음은 자신의 기준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상대방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이 현명하다.

이처럼 생각이라는 것도, 나의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의 공간이므로, 나만의 착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깊이만큼 더 많이 말이다.

그러므로 생각도 내 안에 머물지 않고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른 생각과 가치를 받아들이고, 나의 생각과 가치를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나의 이익에 따라 조석지변 금하고, 늘 보편타당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아무리 옳을지라도, 시대의 흐름에 적합하지 않은 생각은 결코 현명할 수 없다

지나치게 생각을 깊이 하는 것보다, 주변 상황에 맞출 수 있는 생각이 더 가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깊게 생각한답시고 생각이 사람을 가려서는 안 된다.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손해가 되는 사람에게는 엄격 하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말라.

생각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는 잣대가 아니기에 스스로 엄격하고 공정해야 한다.

생각으로 아파하기보다는 그 생각 때문에 행복할 수 있어야 하며, 아픔은 항상 지나침으로 생기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하다



사람들은 흔히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 한다.

그러나 행복은 가슴속에 간직해서만은 그 행복을 지켜갈 수 없다.

따라서 행복은 가슴속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웃음에 전염성 바이러스가 있다든가, 기쁨은 나눌수록 그 크기가 커진다는 말처럼, 행복 역시도 나눌수록 가슴에 더 와 닿는다.

그리고 저 혼자 마음속에 간직된 행복은, 어쩌면 자기만족에 불과하기에 진정한 행복이라 하기에는 뭔가 어설프다.

사람 사이의 좁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미운 감정이든 좋은 감정이든 그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그 어찌 서로 멀어질 수 있을까?

크고 많은 것에 기대는 행복보다는, 오히려 이런 감정의 교류를 통해 느껴지는 것들이 어쩌면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키가 크고 우뚝 선 나무일수록 바람의 부침이 심하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일수록 잃는 것도 많은 법이다.

남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서 행복한 사람보다 스스로 가진 사람일수록 더 행복하다.

힐링캠프에서 MC인 이경규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고 법륜스님에게 묻자,

법륜스님께서 즉답하기를 “행복이란 기분 좋은 것이다. 반대로 불행은 기분 나쁜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대답했다.

이처럼 행복은 결국 나를 기준으로 한 감정의 속삭임인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누군가가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나보다 남에게 더 신경 쓰는 사람이 대다수다.

아마 남에게 하는 것처럼 나를 생각하고 가꾼다면 평생을 행복하게 살 터인데 말이다.

행복은 어쩌면 마음의 풍요에서 얻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비록 조금 부족해도 넉넉하다 생각하면 부자인 것이고, 넉넉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부족하다 여기면 가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슴속의 행복들이 더 큰 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가슴속에 가둬둬선 안 된다.

혼자 아무리 행복해도 주변이 행복하지 않으면 그 행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행복을 남에게 나눠줌으로써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원하는 것이 많을수록 행복보다는 불행에 근접해 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면 생명력이 쌓여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웃음이 보약”이라는 말처럼 주어진 삶을 즐기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즉, 삶은 인간의 영역이지만, 생명은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운명에 맞선다는 둥 하기보다는 운명에 순응하여 스스로 즐겁게 살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많은 것을 원하면 원할수록 행복보다는 불행에 더 근접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생각이 깊을수록 그 상처 역시 깊다.

삶이란 것, 인생이라는 것, 그건 단순히 보고 겪는다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절실하고 간절하게 바라고 깨우쳐야 겨우 껍질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만능인간인 것처럼 모든 걸 다 하려고 억지를 부려서는 곤란하다.

조금이라도 내 능력이 아니라 생각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 도움을 받거나 배워서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려고 하면, 스스로도 피곤하지만 보는 사람 역시 피곤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프면 아프다하고 기쁘면 기쁘다 할 줄 알아야 한다.

저 혼자 일이라고 홀로 감당하려는 것은 잘못하면 오히려 작은 상처를 더 크게 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스스로에게 관대하며 합리화하려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분명 잘못이나 실수를 딛고 일어서야 하지만, 그렇다고 저지르지 않아도 될 잘못이나 실수까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잘못이나 실수는 노력으로 덮어야 한다.

누구에게 인생에 대한 어려운 말을 들으면 꼭 공연히 충고 받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무슨 큰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른 것같이 왠지 모르게 움츠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무거운 것보다 가벼운 것을 좋아하고, 간섭 받는 것보다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러나 힘든 것일수록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으면 늘 같은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다.

잘못이나 실수도 마찬가지다.

설령 그 잘못으로 큰 상처를 입어도 그 상처가 아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청소년기일수록 잘못이나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겪어서 알고 있음에도 저지른 실수는 실수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설픈 것은 아예 모르는 것보다 못하다.

아무리 남들로부터 팔방미인 소리를 들어도 사람은 만능일 수 없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보다 더 똑똑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공연히 위축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스스로 완벽해지려는 노력을 항상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커다란 잘못이나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것이다.




옳음은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안다



나이가 들면 가장 안 좋은 것 중 하나는 아집이다.

즉, 가치관의 고정이라 할 수 있다.

생각이 깊을수록 그 상처 역시 깊다.

가치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또 그 달라진 가치를 수용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그동안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입장이나 주장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이나 입장만이 진실인 양 보기 좋게 포장해서 말이다

그러나 다른 견해나 입장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그 주장을 매도하면서까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만 내세우는 행태에 불과하다.

비난이나 모욕을 주면서도 그것까지 참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생각이 옳으면 굳이 상대방을 설득하고 이해시키지 않아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더라도 그 결과까지 잘못될 거라 믿는 것은 오만이요 편견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옳고 그름이란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

설령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불행이 예견된 상황이라 해도 말이다.

서로의 신념이 다르면 각자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것이 스스로 후회를 남기지 않는 길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나 역시 그 사람의 언행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넘친다.

각자의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라지니까 말이다.

당신의 주장이 옳다면 강요보다는 감동하게 하라.

그것만이 반대자들도 당신의 편으로 만드는 지름길임을 명심하라.

이기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바른 것이 이기는 것이 바로 정의임을 깨달아야 한다.

도움이 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눠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다.

내 것은 조금도 내놓지 않으면서 남의 탓만 해서는 영원히 자신이 만든 허상의 공간에 머물 것이다.

자신만을 위한 공간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잘못하면 아집이나 자기합리화에만 빠져 욕심이나 이익만 탐할 것이다.

곁으로는 손해를 본 듯해도 실재로는 이익을 가져다주는, 혼자가 아닌 함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들을 놓치기 쉽다.

나를 내려놓고 나를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것들은, 물질적인 이익을 넘어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나의 옳음 뒤에 가려진 다른 사람의 주장을 되 집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조금 잘나갈 때일수록 주변을 돌아보라.

가기에 바빠서 해야 할 것조차 지나쳐버리면 언젠가 그 일이 덫이 되어 되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

빨리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삶에 나의 의지를 담는 일이다.

내가 멈추고 싶어도 시간은 언제나 나를 멈추지 못하게 한다.

모든 사람에게 옳음이 존재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에게 좋은 것은 부정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생각이나 의식을 점차 좋은 쪽으로 몰아가다 보면 스스로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굳이 내 생각이나 주장 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아도 그들의 선택에 의해 같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옳음은 굳이 설득하지 않아도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옳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주장하기보다는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이라면 지금 하라.

지난날 못하고 미뤄놓은 것들은 지금도 하지 못한다.

조금은 번거롭고 귀찮아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당장 그것부터 하라.

내가 죽은 뒤, 내 능력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할 때, 아무리 그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

여건이나 능력을 핑계로 지레짐작으로 겁부터 내서 하고 싶은 것을 미뤄서는 안 된다.

물론 때론 마음으로 하고 싶어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존재가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 하지 못하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줄 뻔히 알면서도 과감하게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상대방의 생각과 내 생각에 차이가 있듯이, 가슴이 시키는 것은 얄팍한 계산으로는 알지 못한다.

믿음이나 정에 대한 배신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따지기만 해서는 결코 한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화가 나서 속상한 일이 있거나 또는 무단히 일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그런 상태로 집에 돌아오면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속상한 일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화내고 싸우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라 뒷설거지를 나중으로 미뤄놓으면 그 다음 날까지 넘어가는 경우도 흔하다.

어차피 내가 할 일임에도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일수록 당장 그것부터 하라.

당장은 하기 싫어도 막상 그 일을 하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화난 순간을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급하거나 화난 순간도 그 순간을 넘기면 또 쉽게 풀리는 것이 사람이다.

순간은 삶의 고비며, 고비는 견디어 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순간들이 모여 인생이 되는 것처럼 순간은 멈춤이 아니라 진행이므로 순간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누구나 겪는 과정이라 생각하라.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지는 부자보다 걱정거리가 적다.”라는 말처럼, 아는 것이 많거나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늘 걱정거리를 안고 산다.

그렇기에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도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많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분명 “이것은 아닌데” 하면서도 끌려가는 경우도 흔하다.

지만 마음이 시켜서 하는 일은 비록 손해를 볼지라도 그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해서 후회하는 경우보다 못해서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후회할 때는 하더라도 이것저것 계산하고 재기보다는 과감히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하고 싶어도 건강이나 체면이 허락하지 않아 하지 못할 것들이 늘어만 간다.

여건이 조금 나빠도 할 수만 있다면 미루지 말아야 한다.

미루는 순간 그 일은 나를 떠났음을 잊지 말라.




비난보다는 칭찬하는 사람이 되라



사람에게는 본디 격이 없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사람의 격을 구분하게 만든다.

분명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고 차별받아서도 안 되지만, 실상은 마음으로 그 차별을 인정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순수성이나 도움에 대한 차별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차별적 수용 때문이다.

즉, 친분 정도나 재산 정도, 또는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보는 내 자신의 의식 때문이다.

누군가를 비난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모자람을 탓함이 옳다.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 입장을 내세우지만 칭찬하는 사람은 남의 입장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뭇잎은 썩어야만 새로운 싹을 틔우는 토양이 되지만, 썩은 나뭇가지에서 자란 싹은 결코 그 싹을 자라게 할 수 없다.

썩은 나뭇가지를 잘라내지 않으면 도리어 본 줄기를 좀먹어 들어가 결국 나무의 근본인 뿌리마저 병들게 한다.

삶은 결국 나의 그릇의 크기에 따라 칭찬도 되고 비난도 됨을 잊으면 안 된다.

의지가 있는 사람은 한순간의 실패는 진정한 실패가 아니다.

왜냐하면 의지가 있는 사람은 아무리 그 실패가 클지라도 그 실패가 좌절이 아닌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좌절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나 의지가 있는 사람은 두려워해야 한다.

좌절한 사람에게는 사람이 없으나, 의지가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누군가 도움을 줄 사람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므로 실패는 삶의 하나의 과정이지 그 삶의 전부가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남은 영원히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한순간도 속이지 못한다.

남을 속여 얻은 이득이 영원할 것 같지만, 양심이란 그릇에는 항상 오점이 배겨 스스로를 힘들게 할 것이다.

굳이 깨끗한 삶은 아닐지라도 양심에 못이 박혀서는 평생 아픔을 견디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비난은 당사자에게 직접 행하기보다는 제 3 자를 매개하여 간접적으로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그것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불쾌해 한다는 사실이다.

비난보다는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의 충고가 적절하다.

그러나 가급적이면 비난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행해서는 곤란하다.

삶이 아무리 치열한 전쟁일지라도 아군까지 적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경쟁은 대부분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과 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경쟁은 비난보다는 칭찬을, 경쟁보다는 상생의 방법을 찾아 함께 성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내가 누구를 이기면 나 역시 언젠가 다른 사람을 통해 뒤 쳐지기 마련이다.

적을 만들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친구가 되는 것이라 한다.

친구는 바로 함께 나란히 가는 사람이지 앞뒤로 서열을 정하고 줄을 서는 관계는 아니다.

모정은 끝없는 주기만하는 희생적 사람이라면, 우정은 준만큼 반대급부를 원하는 화합적 사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난하는 사람보다 칭찬하는 사람이 되어라.

비난은 인간이 가진 다양한 심성에 기인한 일종의 질투라는 감정이 낳은 어그러짐일 것이다.

그리고 전체보다는 일부이고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맞은 사람보다 때린 사람이 더 잠을 편히 자지 못하듯, 비난한 사람의 마음은 분명 편치 않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불쑥 먼저 손을 내밀고 그 내민 손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 바로 비난이라는 잘못된 언행이다.

따라서 비난은 적게 하면 할수록 좋다.




인생이라는 나무



사람은 나무의 일생과 그리 다를 바 없다.

나무 그 자체를 “나”라면, 뿌리는 가족이며, 가지는 선후배나 친구와 동료일 것이고, 잎은 그로 인한 인연일 것이다.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하나지만,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잎을 무성하게 하는 일련의 행위는 전부를 향한 몸부림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저 나무처럼 하나이면서 전부이기도 하다.

삶을 함께한다는 것은 바로 마음을 함께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사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다.

때로는 일방적으로 또는 보완적으로 서로 나누거나 희생하면서 서로를 지켜가는 것이다.

뿌리가 건실해야 몸체가 튼튼하고, 몸체가 튼튼해야 잎이 무성하고, 잎이 무성해야 풍성한 결실을 얻음과 같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자신조차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어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적확히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 가지를 믿고 잎을 싹 틔우고 그 잎에서 얻은 영양으로 좋은 열매를 얻어야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목적은 누가 뭐라 해도 행복한 삶이다.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목적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는 목적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다.

심지어 아파하고 슬퍼하는 목적도 그렇다.

행복은 이렇게 마음이 느껴야 한다.

곁에 난 험한 상처보다 몸속에 난 적은 상처가 더 치료하기 어렵고, 빛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하듯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슬픔의 파고를 견디고 넘어야 한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돈을 쫒고 명예를 쫒고, 사랑을 쫒아, 수많은 길을 선택하여 떠나지만, 결국 행복이 늘 나와 함께 있었음을 주어진 삶을 다 소비하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누구나 알다시피 나무는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때로는 무성하게 또 때로는 헐벗은 채 세상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거들먹거리다 사라져도, 차가운 눈이 내려 온 몸을 얼리다 떠나도, 단 한순간도 소홀함 없이 나무는 묵묵히 참고 견디며 따뜻한 햇살이 비추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라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서이다.

지금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 모든 행위가 자신만이 아닌 모두의 것이라면 아마 그렇게 쉽게 처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더러는 이런 삶의 무게를 힘겨워할 터이지만 겨울이면 자연스럽게 낙엽이 떨어지듯,

사람 역시도 스스로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무게만 남겨진다.

그러므로 진정 두려워할 것은 그 무게가 아니라 함께하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한다.

인연이 많을수록 가지는 길고 견실해지고, 가지가 많을수록 몸통을 굵고 튼튼해지고, 뿌리는 더욱 깊고 넓게 박힐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많은 열매와 수확을 얻게 할 것이며, 그 열매는 씨앗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킬 것이다.

이렇게 나무는 혼자이면서도 수많은 생명과 함께하고 있다.



령혼™

단상·칼럼·포토에세이·저널리스트 김진철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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