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라


나의 잣대는 공정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의 도움으로 교육받고 성장한다.

그럼에도 어른이 되면 마치 자신 혼자 자라고 자신 혼자 모든 것은 습득한 양 부모의 말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도 어려울 때는 도와주지 않는 부모를 원망한다.

부모의 못난 과거는 부끄러워하면서 그 손으로 해준 밥이나 음식은 맛있게 먹는다.

그들의 도움으로 화려한 옷을 입고 고운 화장을 하면서도 그들이 주는 돈은 거부하는 법이 없다.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한 번쯤 도움을 받았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을 비난하는 행동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현 상황에서의 자신의 모자람이 내 탓이 아닌 남의 탓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것도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과 삶을 함께 하는 사람에게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공연히 트집과 짜증을 부리고 뒤에서 험담이나 비난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 사람이 준 그동안의 도움일랑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이다.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살다보면 아주 남의 얘기를 안 할 수는 없겠지만, 가급적이면 그것들이 습관화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속담처럼, 입 밖으로 한번 나온 말은 결코 다시 주워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앞에서 하지 못하는 말일수록 좋은 말이기보다는 대부분 험담·뒷담화·비난의 말일 것이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 아닌, 아는 사람의 행동을 나의 잣대로 말이다.

어쩌면 험담의 대상이 되는 대부분의 사람은 나보다 비교우위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요즘 현실에서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살다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물이 아래로 흐르듯 가진 자의 몫을 나누며 살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놓고 말하면 혹여 불이익을 받을까봐 염려하면서도, 어쨌거나 현실에서는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작금의 불편한 상황을 인정하면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도 나 나름대로는 그 도움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고 여기지만, 사람에게 있어 정당한 대가라는 게 얼마만큼 큰 모순인지, 삶의 깊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 대가라는 것은,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늘 크게 보이고,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늘 작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경우에 따라서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도움처럼, 일방적으로 주고 받는 관계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도움이라기보다는 배품이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물론 도움을 줄 때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도움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코 대등한 인간관계일 수 없음이 바로 현실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스스로 누군가에게 뒤진다는 기분을 참기는 쉽지 않다.

특히 그것은 형제자매나 친분이 돈독한 친구 사이일수록 마음의 상처는 더 깊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는 늘 나와 비교 대상이라서 그렇다.

하지만 역지사지라고, 그렇기 때문에 가급적 하고 싶은 말일수록, 뒤에서 하지 말고 당당하게 앞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쨌거나 나와 삶을 함께하기에, 나만 싫다고 해서 단절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뒤돌아 욕하고 앞으로 칭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그럴수록 실없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자신뿐이다.

비록 생각이나 마음으로만 하는 것일지라도 때로는 얼굴에 묻어나는 법이다.

얼굴은 바로 내 마음의 거울이요 대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상처가 난다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상처가 난다.

꼭 누군가가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아도,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이런저런 잡스러운 사념에 빠져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것이다.

그만큼 부동심을 일관되지 유지하기 힘들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만큼 변덕스러운 것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걱정과 아직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에 대해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어느 정도 스스로 삶을 살아온 사람치고 상처 하나 안 가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몸이든 마음이든 어느 한구석엔가 남들에게 들어내 놓고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상처를 품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그 상처를 달랠 길 없어 밤마다 남몰래 베게 깃에 눈물을 훔치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말 못할 상처는, 나이가 들수록 덜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이만큼 더해만 가는 것 같다.

그래서 가슴에 남은 추억의 그리움만큼이나 그 상처도 깊어만 간다.

세상에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조차 어머니의 고통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것이다.

지식을 얻으려면 배움이란 고통을, 식견을 높이려면 경험이라는 고통을, 의식주를 얻기 위해서는 일이라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이와 같은 고통은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지울 수 없는 상처도 준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 뒤에는 달콤한 열매뿐만 아니라, 상처라는 반대급부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흔히들 마음의 상처는 화가 쌓여서 만든다고 한다.

그만큼 화는 남을 향하든 자신을 향하든, 가급적 풀고 살아야 만수무강에 도움을 주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화는 풀어야하는데 푸는 방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일 것이다.

무턱대고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 풀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친한 사람에게 풀기에는 내 속을 들어내 보이는 것 같아 꺼림칙 할 것이다.

그래서 자기합리화나 긍정적인 마인드와 같은 자가 치유를 하지만, 그조차 마음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하기란 힘들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결코 누가 화를 많이 낸다고 해서 입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화를 당하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의 수용 여부일 것이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 상대방으로부터 화를 먹을 만큼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라면 그 어찌 마음의 상처가 되겠는가?

마음의 상처는 상대방의 화가 부당하다는 인식이 마음 저변에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다 누군가에게 화를 냈으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지난 뒤, 반드시 화를 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좋다.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흔치 않다.

“이것만 있으면 좋을 텐데, 저것만 가졌으면 원이 없을 텐데.”하고 늘 자신의 부족함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삶의 한계에 부닥치는 회수가 늘어가고 그로 인하여 점차 자신감도 잃어가게 된다.

이러한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자책과 실망이 고스란히 마음의 상처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상처는 남에 의해서보다 자신에 의해서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마음의 상처는 때때로 가만히 놔두는 것이 더 좋을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처는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문제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안 되는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기는 것이 좋다.

가급적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남에게 인정받기보다는 스스로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욕이나 험담, 뒷담화를 두려워 마라



세상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욕과 험담은 필요악이다.

아무리 고맙고 소중한 사람일지라도 살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그 어찌 없을까?

그 고마움과 감사함에 가려 정작 화난 일이 있어도 말조차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소중한 마음이 옅어질 것이다.

그릇의 크기에 맞지 않게 많은 물은 오히려 넘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조금 더 부드럽게, 달콤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삶은 더욱 고단하다.

그만큼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나 하기 싫은 일도 늘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억지 춤을 추기보다는, 차라리 그 옷을 스스로 벗어던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 등과 같은 특정관계자들에게 너무 억매이지 말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때로는 화도 내고 험담도 하면서 말이다.

솔직히 내가 없을 때 누가 나를 욕한들 그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때로는 우연히 스쳐 지나가다 등 뒤로 들려오는 친구나 동료의 험담에 자리를 피한 적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욕이나 험담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의도를 가진 악의에 찬 험담이 아니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버리는 대인배적 방관도 필요하다.

세상의 기준에 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라면 험담 역시 삶의 충고로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욕이나 험담을 두려워 마라.

욕이나 험담도 나를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결국 욕과 험담도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일종의 관심인 것이다.

하지만 욕이나 험담을 들을 때는 대부분 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을 경우가 많기에, 생각을 바꾸면 욕이나 험담을 듣는 것조차 행복한 일이다.

누군가에게 욕하는 이유는 손해 본다는 기분이 들어서이다.

분명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음에도 눈 앞의 손해에는 민감한 것이 사람이다.

때로는 난동을 부리는 것도 모자라, 두 번 다시 안 만날 사람처럼 편을 가르는 짓조차 서슴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짐승 새끼는 길러도 사람 새끼는 기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격언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당사자로부터 직접적으로 듣는 욕이나 험담이 아니라면, 웃으며 넘기는 것도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예전 SBS 역사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도대왕 역을 맡은 한석규의 욕 연기를 실감 나게 본 기억이 있다.

위대한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대왕 역시 그러할 진데, 하물며 평범한 우리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으랴?

어쩌면 욕과 험담은 힘없는 서민들이 힘 있는 권력자에게 하는 애교는 아닐까?

애정이나 관심이 없으면 욕과 험담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욕과 험담도 일종의 문화인 것이다.

나이가 들면 욕도 못한다.

일종의 체면유지이겠지만 스스로 부끄러워서 이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이고, 어른으로써의 자존심도 한 몫 할 것이다.

끝장을 볼 때까지 싸울 작정이 아니라면, 설령 욕을 먹더라도 웃으며 넘어가야 할 때도 비일비재하다. 

사람이 하는 일이 항상 정의로울 수 없기에, 욕과 험담 역시 나의 잘못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경고임을 잊으면 안 된다.

세상을 혼자서는 못산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많은 사람과 접하면서 어찌 욕 한번 듣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욕과 험담을 당연하듯 들어서도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거기에 집착하여 자신감마저 잃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더러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더라도 대놓고 욕하기 어렵다면, 없을 때라도 큰 소리로 욕 좀 한들 어떠랴?

주어진 삶을 즐겁게 사는 것 또한 내 삶의 권리일 것이다.




신념의 변질을 경계하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고정된 생각, 즉 신념의 변질이 아닌가 싶다.

신념은 일반적으로 살아오는 동안 얻은 경험이나 지식을 통해 정립된 자신만의 생각이나 정의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고정되어 유연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도통 남의 의견이나 충고를 들을 마음조차 갖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만의 신념 안에 스스로 가둔 채 남의 탓만 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고립만 자초할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과 어울려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보려하고 더 많이 변하여야 시대의 흐름에 따라갈 수 있다.

스스로의 생각이나 가치에 너무 집착하면 할수록,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있어야, 다른 생각도 받아들일 수 있다.

신념은 옳음에 대한 지향일 것이다.

그렇기에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신념은 버리는 것이 좋다.

나의 신념을 위해 남을 이용하거나 옳지 못한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무 신념만 앞세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어루만져 주지 못하는 것 또한 옳지 못하다.

윗물이 아래로 흘러가듯 신념도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신념과 신념이 부딪치는 것은 결국 사람의 그릇 차이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남 앞에 나서기보다는, 자신부터 돌아보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자신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사람을 내 신념 앞에 앞세우려 하는가?

신념의 실현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함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 일방적인 주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모나지 않도록 유연한 생각이 필요하다.

일상을 같이 보내는 가족도 각자마다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르다.

내가 번 돈으로 내가 보살핀다고 해서, 나의 뜻에 따라 그들의 삶도 결정될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나는 단지 그들의 신념과 가치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그들 역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할 때, 그들의 삶 역시 행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내가 마음을 열음으로써 그들 역시 행복했으면 좋겠다.

신념은 곧 내 마음의 굳건함이다.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일수록 잎이 무성하듯 마음이 단단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주관을 잃지 않아야 화려한 말이나 꼬임에 흔들리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진실을 진실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얻게 될 것이다.

난 매일 조금씩이라도 변하려고 노력한다.

너무 내 주장에 얽매어 스스로 아파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의견을 귀기울이려 한다.

그리고 신념을 앞세워 소중한 사람들의 마음을 구속하거나 억압하고 싶지도 않다.

마음을 열고 긍정의 눈으로 내가 먼저 이해하고 다가가고 싶다.

나의 생각과 신념만이 최고라는 아집을 버리고,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마음과 생각을 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버림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나이가 들면 버려야 할 것이 많다.

물욕이나 명예욕도 버려야 하고 심지어 이성에 대한 사랑의 감정도 덜어내야 한다.

그렇게 버리고 버려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이나 사람에게 바랄 게 많으면 그만큼 세상이나 사람에게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세상이나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내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

주변 사람들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의외로 소통되지 않아 고생할 때가 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해도 자신의 입장에서만 말을 하니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당황하게 되는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이나 말은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으니 말이다.

조금만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바라게 된다.

아마 상대방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왜 이다지도 생각이 경직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공연히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거나 토라져 저 혼자 속상해서 어쩔 줄 모른다.

그냥 넘어가거나 지나쳐도 될 일인데, 공연히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스스로 속 좁은 짓을 하는 것이다.

조금만 대법해도 좋으련만, 언제부터인가 저 홀로 나이 먹은 척 충고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곁으로는 항상 유연한 척 받아들이는 시늉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다르다.

버린다는 것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사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소중함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고, 가진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버림으로 인해, 마음의 편안함과 소중함의 가치를 더 깊이 깨닫기 위한, 자신만의 마음을 수양하는 과정인 것이다.

스스로 신념이란 벽을 허물어 새롭게 자아를 일깨우고 정립하는 마음과의 소통인 것이다.

그러나 버린다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특히나 저 혼자의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의 삶과 엮여있을 때 더 그렇다.

혼자라면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그만이지만, 그렇다고 소중한 사람들의 것마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혼자서 버티지 못할 정도로 어렵고 힘든 일에 처해도, 포기하기 못하고 마음을 추슬러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 자란 나무일지라도,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듯이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몸은 비록 비대해져도 욕심은 줄어져야 한다.

그래서 <법정 스님>께서는 <버리지 않으면 새 것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가득 찬 그릇일수록 비워야 또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듯이, 사람도 버림을 통해 새로운 것은 채워나가야 한다.

그동안 삶을 통해 배우고 경험한 것들이어도, 그것이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하나를 더 가져 더이상 가질 수 없는 것보다, 하나를 버려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음이 바로 버림의 미학인 것이다.




최선을 다한 노력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의문과 확신”이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차이에서 오는 심리적인 현상이라 할 것이다.

솔직히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아는 순간부터 기쁨보다는 슬픔을 느끼는 횟수가 훨씬 더 많다.

스스로 한계를 자각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 가슴 아픈 일이다.

왜냐하면 <할 수 있다.>는 마음은 희망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불편함 없이 일상을 보내다보면, 어느 날 문득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탈하게 지나가는 날들이 공연히 염려스러워서다.

이처럼 사람은 편안함만 있어서는 스스로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

그것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연히 불안해서다.

그렇게 대부분 사람들은 어려운 일일수록 <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할 수 있다.>라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임하지만,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그 의지도 점차 약해지기 마련이다.

“할 수 있다.”라는 마음이 점차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일을 시작도 해보기 전에 염려와 불안으로 주저앉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솔직히 매사에 <할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어도 얼마나 좋을까?

왜 <할 수 있다.>라는 의지를 가지고 일상을 살 수는 없는 걸까?

실제로 그렇게 치열한 삶을 살아도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말까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남들과 냉정히 비교할 때, 비교우위에 있는 능력은 단 하나도 없음을 인정한다.

아무리 내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그저 조금 나을 정도지, 경쟁에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한다.

그러니 매사에 그 어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일상을 살 수 있겠는가?

어쩌면 너무 자신의 능력에 적합하지 않는 욕심으로 인해 <할 수 있다.>라는 의지를 상실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부터라도 나이와 능력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삶의 목표를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너무 큰 목표보다 자신의 능력으로 달성 가능한 목표로 낮추고, 남을 의식한 목표보다 진정으로 자신에 필요한 목표를 세우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따라는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자신감의 회복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몸으로 때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현실이란 벽에 가로막혀 해결할 수 없는 일은 늘어만 간다.

그래도 살아가야하니까 임시방편으로 땜질하듯 넘어가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것처럼 불안하고 초초하다.

그래서 지나 시절을 후회하고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안타까워 하지만 그 모두가 부질없는 짓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막연히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지.”란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일은 사람이 하지만 그 일의 성공은 하나님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할 수 없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부터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부호보다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최선을 다한 노력은 결코 그 결과에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하니까 말이다.




 진리는 하나이면서 다른 이유



세상의 진리는 하나이지만 그 이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가 아니다.

마치 같은 경치를 보고도 어떤 사람은 아름답다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볼 것 없이 공연히 눈만 버렸다 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사람마다 식견이 다르고 가치가 달라서다.

그 사람이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 진리의 모습도 다르다.

같은 사물이라도 어린 시절에 볼 때와 어른이 된 뒤 볼 때 큰 차이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은 한계가 있고 대자연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대자연은 사람의 인식수준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진리는 하나인데 사람마다 제각각인 이유다.

노인들을 보면서 기운이 넘치는 한창 때는 그저 볼품없고 힘없는 사람이라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세상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데에는 그 노인만큼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그것은 그간의 경험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정답인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리는 세상속에 살아있을 때라야 존재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거거거중지(去去去中知) 행행행리각(行行行裏覺)>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가다 보면 알게 되고, 행하고 행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진리란 본디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성장에 따라 그 의미 역시 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급해하지 말고 인생이라는 과정을 통해 진리의 의미를 하나하나 깨달아 가야 한다.

부처의 마음을 가지면 곧 부처라는 말처럼 진리 역시 마찬가지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바로 나에게 속한 세상일이라도, 그 세상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는 사람마다 마음속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올곧음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중심이며, 이성의 척도고, 가치의 기준인 것이다.




멀리해야 마음이 보인다



사람은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음에도 늘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한다.

그렇게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내, 누군가의 부모나 친구로 함께 존재하지만 대부분 그것도 필요할 때뿐이다.

익숙함은 때로는 편안한 위로가 되지 못하고 질릴 수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 없이는 안 될 거야.”라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상대방의 눈높이에 맞출 자신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기대 역시 버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금 자신이 처한 위치를 가만히 바라보라.

아마 가고 싶은 곳은 많아도, 막상 가려하면 갈 곳도 그리 마땅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이런저런 제약 때문에 선뜩 나서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주변에 사람은 많아도, 막상 부탁하려고 꼼꼼히 따져보면, 지금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볼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도 어느 정도 관계가 성숙 되면,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이나 의존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살면서 누군가의 도움 하나 없이 살아가기는 힘들지만, 그럴수록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번 의타심이 생기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조차 남에게 의지하려 들기 쉽다.

사람은 비록 같이 살지만 언제 어떻게 헤어질는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도 하기 싫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이런 사소한 불만들이 쌓여 사람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내게서 가까운 사람일수록 멀리해야 마음으로 고마워할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이 주는 도움은 도움이 아니라,  받을 것을 받는다는 당연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종종 잃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도움을 줘도 도움을 주지 않아도 왠지 모르게 마음속에는 거리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헤어진 뒤에 그 사람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처럼 사람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자신의 소중함만 계산하지 말고 스스로 상대방의 소중함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소중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심리는 그럴수록 더 많이 더 풍족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한다.

힘들수록 스스로 이겨나가는 것이 바로 자신의 소중함을 지키는 것이다.




매일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



세상에서 마음만큼 길들이기 어려운 것도 없다.

마음이 한번 날뛰기 시작하면 거친 들판을 뛰노는 야생마처럼 다시 붙잡기가 극히 어렵다.

하지만 마음이란 결국 자신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좋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행복을, 욕망에 이끌려 유혹에 빠져들 때는 불행을 선물하기도 한다.

따라서 욕망이란 놈은 이성보다 강하여 마음의 빈틈을 노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음에는 한계가 없다.

그렇다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담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마음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할 뿐만 아니라 그 크기나 넓이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분명 내 몸속에 있음에도 스스로조차 그 마음을 알지 못하기에 늘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또 분명한 행동이나 의사표시가 필요할 때조차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려 애를 먹을 때도 많다.

꼭 바르고 옳은 마음만 마음이 아니다.

이익을 탐하는 것도 욕망을 채우는 것도 거짓을 진실인 양 포장하는 것도 곧 나의 마음이다.

그렇기에 경우에 따라 속마음과 달리 말해야 할 때도 있다.

그것은 대부분 나의 욕심 때문이지만 나보다 상대방을 위한 배려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중심은 항상 옳음(正)이어야 한다.

마음이란 늘 어려움보다는 즐거움을 쫒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것보다 재미나고 유쾌한 것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또한 평범함보다 특이함을, 추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에 더 마음이 쏠리게 된다.

매사에 마음의 주인이 되어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늘 그러지 못해 갈등과 번민에 쌓이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 의한 흔들림보다 스스로의 생각에 흔들리는 경우가 더 많은지 모른다.

욕망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욕망 때문에 성공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마음의 주인은 그 욕망을 경계하고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욕망 때문에 규칙이나 목표를 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그것을 정하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의 크기를 채워주는 것은 지식이나 정보이지만 마음의 넓이를 넓혀주는 건 경험이다.

매일을 온전히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

하지만 누군가가 던진 가벼운 농담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리고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다른 누군가가 항상 내 마음에 드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없음에도 난 늘 그래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음속으로야 늘 웃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다짐을 하지만 한순간을 참지 못해 늘 후회하게 된다.

그래도 더 많은 것을 잃지 않으려면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한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생각이 머무는 그 모두가 현재의 삶이다



오늘을 힘들게 사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서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 중 하나가 미래라는 단어인지도 모른다.

미래는 새로운 것들을 도전하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래라는 것이 있어 현재의 삶을 그만큼 등한시할 우려도 있다.

우리가 쉽게 하는 말 중 <오늘 못하면 내일하면 되지>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각오나 결심을 쉽게 버릴 수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래서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그리고 살아있는 현재에 충실하라.”라고 했다.

과거만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인생이 덧없고 후회스럽다.

미래를 생각하면 공연히 희망이 생기고 가슴이 벅찬 기대감이 들게 한다.

그러나 현재는 늘 남의 일처럼 어렵고 힘들며 고생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현재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숨 쉬는 공간이다.

미숙한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미래를 바라본다고 한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현재에 충실한 사람인 것이다

현재에 충실하면 과거의 모자람이나 잘못도 채워질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꿈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현재는 단지 과거나 미래를 이어주는 가교가 아니라, 바로 내 인생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현장인 것이다.

미래에 대한 꿈이 클수록 현재는 그만큼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항상 현재가 과거나 미래보다 커야 올바른 삶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오늘, 내일, 1년, 2년, 이런 숫자나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이 머무는 곳이 아닌가 싶다.

비록 시간은 이미 지나갔으나, 그 잘못을 수정할 수 있으면 그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인 것이다.

현재에는 당장 필요하거나 소용되지 않는 미래를 위한 준비 역시도 현재다.

과거나 미래가 현재의 삶을 방해하는 장애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우리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그 과거의 삶을 되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성찰하여 현재의 삶을 개선하고, 보다 더 쉽고 원활하게,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미래를 꿈꾸는 것 역시 현재보다 더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과거 지향적이면 고치기에 바쁘고, 너무 미래지향적이면 계획하기에 바빠 현재의 삶에 충실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불행은 마음에서 온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불행은 결국 마음이 만든 모자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늘 즐겨 쓰는 말 중에 미래지향적이라든가 진취적이라는 단어가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뭔가 풋풋하고 신선하면 새롭고 희망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 역시 현재의 연장일 뿐이다.

현재는 결국 시간적이라기보다 자신의 생각이 머무는 그 모두가 현재의 삶인 것이다.



령혼™

단상·칼럼·포토에세이·저널리스트 김진철 웹사이트

    이미지 맵

    단상 다른 글

    댓글 0

    *

    *

    이전 글

    다음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