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 위해서는

Canon EOS 5D Mark III | 1/200sec | F/2.8 | 0.00 EV | 70.0mm | ISO-1600 | Flash fired, compulsory flash mode | 2014:06:02 12:05:47레이싱모델 황리아


내 것과 남의 것




내 것과 남의 것을 간단히 정의한다면, 현재 내가 가지고 있거나, 필요하거나 원하면 언제든지 가능한 것이 <내 것>일 것이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것이 <남의 것>일 것이다.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고 원하는 것에 쓸 수 있도록 내 것이 많아야 그만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음도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산다는 것은 내 것을 더 확보하기 위한 다른 사람과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치열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때문에 삶은 공정한 게임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런 아귀다툼과 같은 경쟁을 피하기 위해, 사회를 만들고 법을 만들었지만, 그것을 다 지키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거나 추켜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 않나 싶다.

정말 내 것이라 생각하면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진다.

내 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닦고 어루만지고 아끼고 안전하고 환경 좋은 곳에 보관할 것이다.

하지만 남의 것이나 공동의 것은 서로 먼저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다 동원한다.

정말 자기 것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엇이든 함부로 사용하거나 취급하지 않고 스스로 아끼게 되어 있다.

오래되고 조금 고장 났다고 해서 함부로 버리기보다는, 몇 번이라도 수선하여 조심스럽게 아껴 사용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요즘 결혼 시즌이라 예식장 뷔페에 가보면, 내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과, 남의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고스란히 알게 될 것이다.

내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자기가 먹을 만큼만 가져와 말끔히 접시를 비울 것이고, 반면 남의 것이라 여기는 사람은, 다 먹지도 못할 정도로 접시에 넘치도록 가져와서는, 맛있는 것만 대충 먹고 버리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공공시설이나 직장에서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조차 없이 수돗물이나 전기를 넘치도록,  펑펑 쓰다가, 집에 돌아오면 돌연히 구두쇠가 되는 이중적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내 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남의 것도 소중히 여길 줄 안다.

사랑이나 돈처럼 지금 내가 가졌다고 해서 완전히 내 것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것들도 있다.

가질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살다 보면 남의 것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나의 필요에 의해 남의 것을 빌려왔을 경우 그것을 내 것처럼 소중히 사용하고 돌려줘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남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바로 신뢰와 직결된다.

단지 그렇게 믿을 뿐이지, 내 것이라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분명 내 몸은 내 것이지만 내가 하는 생각이나 행동조차 내 의지대로 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내가 벌어온 돈으로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키워온 자식일지라도,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게 세상 이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내 것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잠시 내 곁에 머물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린 마땅히 남의 것을 탐하기보다는, “내 영혼에 깃들 수 있는 마음의 양식”을 채우는데 한 층 노력해야 할 것이다.


Canon EOS 5D Mark III | 1/200sec | F/2.8 | 0.00 EV | 123.0mm | ISO-1600 | Flash fired, compulsory flash mode | 2014:06:02 12:05:55



잘못이 습관이 되지 않아야 한다



잘못의 모든 원인은 내게 있다.

나를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음에도 나는 나를 잠시 잊어버린 것이다.

알면서도 다스리지 못함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했다.

내 손을 쥐고 있을 때 그것이 귀함을 알아야 하는데, 떠난 뒤에야 알게 되는 것도 처음이 아니다.

잘못을 알면서도 매번 이렇게 습관처럼 반복하는 것은, 삶의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탓일 게다.

한 푼이라도 헛되이 쓰지 않고 써야 할 곳에 쓰는 빡빡한 삶을 살아다고 해서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하는 확신도 없다.

아무리 정답이 없는 삶이라도, 살면서 삶의 목표가 흔들리지 말아야 지킬 수 하는데, 순간순간 마음으로 전해오는 흔들림을 참지 못한다.

가치는 인정받을 때 빛이 나는 법이다.

혼자 기를 쓰고 아끼고 절약해서 모아놓아도 쓰는 사람이 써야 할 곳에 써주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혼자 걱정하고 염려하고 또 그래서 조바심쳐봐야 혼자 아플 뿐이다.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이 없는가 말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런 마음으로 충동적으로 저지른 잘못된 행동을 내 스스로는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 자신에게도 떳떳하지 못하기에, 잘못된 처신 뒤에 따라오는 것은 부끄러움이요, 후회의 쓰라림뿐이었다.

이젠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처음부터 잘못의 여지가 될 수 있는 일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나를 너무도 모르면서 안다는 착각에 빠져 살아 온 것이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나의 의지로 나를 다스릴 수 있을 때를 말함을 잊은 것이다.

삶이 짜증스럽다고, 스트레스를 푼다는 갖은 이유로 술을 마시고 깨고 나면 후회하면서도, 같은 상황이 오면 또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기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은 그저 자기변명이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뿐이다.

몸이 원하고 마음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욕망일 뿐이다.

그것들은 결국 내게 진정으로 도움이 되거나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 나중에 독으로 변질될 수 있는 것들이다.

지금부터 떨쳐내지 않으면 난 결국 미래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을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나의 잘못을 감싸 안기보다는 처음부터 그 원인을 과감히 도려내는 의지를 실천하려 한다.


Canon EOS 5D Mark III | 1/200sec | F/2.8 | 0.00 EV | 160.0mm | ISO-1600 | Flash fired, compulsory flash mode | 2014:06:02 12:06:01



양심에 대하여



양심(良心)이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善)과 악(惡)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다.

또한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는 자신만의 가치요 기준인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은 누가 봐도 인정할 수 있는 범위에 속해야 하며, 같은 사물을 바라보는 의식이 명확해야 한다.

그만큼 양심은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이나 가치에 가까워야하며, 상식적이고 일반적이며 보편타당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물에 대한 기준이나 의식이 시시때때마다 달라져서는 곤란하다.

그러므로 인생을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양심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양심이 올바르게 서지 않으면,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러한 행동이 잘못된 일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양심이 제대로 정립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양심은 저절로 키워지는 것이 아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예에서 보듯이, 바른 것을 보고 또 그것을 경험하여 마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성적에 너무 집착하여, 정작 세상을 올바르게  변별할 수 있는 양심을 키울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살면서 공부보다 성적보다 더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인성교육임에도 현실에 집착하여 잊어버리는 것이다.

성적이 좋아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도 양심이 제대로 서있지 않으면 결국 상사의 눈 밖에 나기 쉽다.

또한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고 쓸데없이 고집만 내세우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살아가면서 내 삶의 기준을 현실감 있게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양심의 변화는 곧 자아의 발전이다.

그렇게 양심은 배움에 따라, 경험에 따라, 또는 깨달음에 따라 끊임없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변화해야 한다.

학창시절 때 다르고, 청춘일 때 다르고, 장년일 때 다르고, 노년일 때 달라야 한다.

그렇다고 양심의 변화를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큰 것을 보지 못함을 경계해야 한다.

세상을 날로 변하는데 양심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오히려 한계를 만드는 벽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생각이 머물면 행동도 머물고 마음도 머물기 마련이다.

젊었을 때는 활동적이고 능동적이라 무엇이든지 적극성을 띠고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싫어한다.

그래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부정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판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저 몸의 변화일 뿐, 사물을 판단하는 눈마저 늙어가서는 곤란하다.


Canon EOS 5D Mark III | 1/200sec | F/2.8 | 0.00 EV | 140.0mm | ISO-1600 | Flash fired, compulsory flash mode | 2014:06:02 12:06:10



되돌아 가는 길



되돌아간다는 길은 언제나 쓸쓸하다

특별히 무엇을 후회해서, 또는 미련이 남아서 돌아가는 것이 아님에도 항상 그렇다.

그 길은 왠지 어두울 것 같고, 인적이 끊어진 아무것도 없는 산길을 혼자 걸어가는 것처럼 허전하다

그리고 저녁 무렵, 땅거미가 길게 드러누운 허허벌판으로 덩그러니 노을이 붉게 내려와 앉은 듯, 왠지 무거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렇게 돌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등 뒤로 바람이 일 듯, 눈물 흘리듯, 왠지 안쓰럽게 비추지는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되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후회나 미련이 남아있더라도 내 삶에 대해 진심으로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없다..

하지만 길을 걸을 때 항상 앞만 바라보고 걷을 수 없듯이, 인생은 나 혼자만의 길일 수 없기에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때로는 나의 잘못에 의해서, 혹은 동반자의 잘못에 의해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인생이란 길은 이렇게 인연이란 거미줄로 얽히고설켜, 때로는 의지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인연으로 인해 아픔을 겪기도 하다.

비 오는 날 창가에 서 보라

먼지 낀 유리창이 아니더라도 내 입김에 의해 바깥 풍경이 잘 보이지 않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하지 않더라도, 때로는 의도하지 않는 잘못에 의해 머물거나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은 가슴을 후벼 파듯 아프고 괴로운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달콤한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다시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길로 떠나야 하기 때문인데, 이처럼 인생이란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단 한 번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을 가로막는 장벽조차 없는 순탄한 길이라도, 항상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잘못이나 실패로 되돌아갈지라도, 돌아가는 길이 과거의 그 길이라면 애써 없는 용기라도 짜내어 다시 도전할 수 있을 터이지만, 이미 그 길은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음에도, 나는 만날 수 없는 그 길을 찾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가장 행복할 때 멈출 수 있었으면 좋을 터이지만, 그 길은 언제나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인생은 왜 그리 열심히 열정적으로 살 때, 오히려 실수가 더 많고 자신이 저지르는 잘못을 알지 못한다.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해서 알면서도 모르고 넘어 갔을까?

아니다.

정말 모른다.

열심히 산다는 건 이렇게, 사소한 잘못쯤은 그저 마음으로 품고 사는 것이니까.

그래서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바로 이런 알게 모르게 저지르게 되는 사소한 잘못이다.

어쩌면 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고 무모하게 달려들어야만 했던 일이나 사랑처럼, 그것은 바로 내게 주어진 숙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미래를 보고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린 과거 속에서 살아간다.

미래는 내가 가야만 알 수 있는 꿈이라면, 과거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일지라도 나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다.

그래서 추억이란 이름으로,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곱게 포장하여,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필요할 때 꺼내보고는 하는 것이다.

누구나 지난 시절, 자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은, 언제나 막다른 길목에 서 있을 때라는 것이다.


Canon EOS 5D Mark III | 1/200sec | F/1.4 | 0.00 EV | 50.0mm | ISO-800 | Flash fired, compulsory flash mode | 2014:06:02 13:08:42레이싱모델 허윤미



초심 지키기



초심은 처음에 먹은 마음이다.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기에 만족을 모른다.

그래서 분에 넘치도록 많은 것은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남의 것이라면 콩 한쪽도 탐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계회대로 목표를 달성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쓰는 <초심을 잃지 말라.>라는 말은 처음 어떤 일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란 말이 아니다. 과거로는 다시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다시 돌아가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삶이 행복했든 아니면 불행했든, 과오가 있든 없든,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는 곧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부정하면 <나>를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야말로 <나>란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심을 지키는 것은 바로 나를 스스로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가치 있게 하는 일이다.

높은 곳에 서면 넓은 세상을 볼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내가 어느 곳에서 출발했는지 그 시작점을 명확하게 찾기란 어렵다.

자신이 걸어가는 인생길 역시, 때로는 이미 만들어진 길에 편승해서 갈 때도 있지만, 또 때로는 내가 가기 위해서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수많은 길이 있어도, 정작 내가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자신이 걸어가는 길이 바로 자신만의 인생길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길을 가는 모든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다르듯 생각이나 느끼는 가치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바른 길을 가든, 아니면 허영과 사치로 잘못된 길을 가든, 그것은 결국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초심을 지키려는 것도 타의보다는 자의에 의해 지켜져야 한다.

본래 의도했던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는 본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시선에 너무 일비일희하거나 좌지우지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도움이 되는 의견마저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알다시피 모든 일은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며, 그에 대한 결과 역시 본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초심을 지키는 것도 결국,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살고 그 결과로 행복을 얻기 위한 처세이며 수단이다.

무엇이든 처음 계획을 세울 때의 그 열과 성의면 세상에 못 이뤄낼 것은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달라지듯 조건이나 환경이 달라지기 마련이고, 목표를 달성하려는 의지 역시 약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의지가 흔들릴 때 목표점에 올바르게 지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走馬加鞭이란 의미처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자신에게 용기와 신념이라는 채찍을 가하듯, 마음의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이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자신의 의지나 가치를 가다듬어 바른 삶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초심 지키기>라 할 것이다.

가면을 쓴다고 해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굳이 가면을 쓰고 사람을 속이기보다는 차라리 진면목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사람사이를 더 가깝게 한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한번 가면을 쓰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느끼나 나중에는 그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얻으려면 진심만큼 좋은 처세술은 없다.

가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빈껍데기뿐이다.

최상의 상태에서 최상의 결과를 얻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최악의 상태에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것은 최악의 상태를 겪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값진 결과이니까 말이다.

초심을 지키려는 것은 이처럼, 어려움에서도 자기의 중심을 유지하여 최상을 결과를 얻으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므로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나의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자정의 시간>이라 할 것이다.

살면서 가장 못된 행동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짓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시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존재다.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움직이다.

그 많은 움직임 대부분은 스스로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그것을 부정하면 결국 나란 존재도 필요 없는 것이다.

내가 두 눈을 통해 바라보고, 두 손으로 만져보고, 두 다리로 걸어가면서 마음으로 몸으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바로 나의 세상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란 존재를 통해 만들어진 나만의 세상일진데, 나를 부정하여 빼고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無)가 되는 것이다.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먼저 나를 올바르게 세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거창하게 무슨 가치관이나 인생관이니 하는 틀에 박힌 가치보다, 내 스스로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슨 일을 하든지 망설이지 않고 소신 있게, 자신의 의지를 담아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멀리 있다 여기면 끝없이 멀리 있고, 어렵다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워 보이는 것이 바로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루고자 바라는 것들은 항상 내 주변 가까이 있어, 언제든지 노력하면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 몸에는 자정 기능이라는 것이 있어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다.

그래서 몸에 모기와 같은 벌레가 물었거나 가벼운 상처를 입어도, 굳이 약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치료가 된다.

또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취미활동이나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다른 행동을 한다.

우리의 삶 역시 그렇다.

힘들고 어려운 일 뒤에는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흐르는 물처럼 두 번 다시 처음으로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것이기에, 나 스스로 나의 응원군이 되어 나를 지켜내야 한다.

인생살이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더 >라는 욕심 때문에 생긴다.

“조금만 더 잘했으면, 조금만 더 많았으면”라는 기대는, 그것을 충족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모른다.

그래서 욕심은 <재키와 콩나무>라는 동화 속 콩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나 <본연의 자아>를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에 넘치는 욕심이 많아질수록, 나보다 못한 낮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보다 조금 못한 사람, 나보다 조금 가난한 사람, 나보다 조금 못생긴 사람을 보면서, 스스로의 가치를 다시 한번 정돈할 필요가 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앞장 서 달리는 사람일수록, 키가 큰 나무일수록, 비바람에 견디기 힘들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 서 간다 해서, 즐거움 역시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앞에 가기 위해서, 바쁘게 살다 보면, 잃어버리는 것도 그만큼 많고 클 수밖에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삶이 모나지 않고 향기가 나는, 서로서로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삶이, 더 가치 있고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항상 위로만 쳐다보면 목이 아프다.

그래서 시선은 항상 정면을 바라봐야 한다.

위를 보고, 아래를 보고, 옆을 보고, 때로는 뒤돌아보더라도, 한 곳으로 고정한 채 오래 바라보기는 힘들다.

이처럼 인생살이 역시, 너무 위나 아래 혹은 주변의 환경에 집착보다는,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나를 부정하거나 믿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으므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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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내지 말고 사랑으로 답하라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자꾸 마음에 담으려 애쓰지 말고, 내려놓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손에 움켜쥐고 놓치지 않으면 모두 내 것일 줄 알지만 힘 떨어지면 내가 놓지 않아도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움켜진 것들이, 내가 원하는 곳이나 사람에게, 더 유익하게 쓰여 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지킬 능력도 안 되면서 움켜쥐고 있으면 나중에 오히려 보지 않아도 좋을 것들을 봐야 하는 상황까지 몰릴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원하는 것보다 마음의 안정을 유지하고 스스로 지키는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

젊은이의 특징은 능동적이고 과감하지만 무모할 때가 많고, 늙은이의 특징은 부정적이고 신중하지만 두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젊은이는 주변의 환경이나 조건에 둔감하나, 늙은이는 주변의 시선에 민감하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고 싶어도, 그 일의 결과로 인해 내게 닥칠 파장이 두려워 쉽게 움직이지 못한다.

젊었을 때야 한번 실패를 해도 경험이다 여길 수도 있지만, 늙어서의 실패는 바로  인생 전체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번 실수는 병가상사(兵家常事)란 말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늙어서의 도전이 용기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 역시 한계를 정해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결집하여 한 곳에 집중해서 해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데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도전도 새로운 것보다, 기존의 것을 조금 더 발전적이고 자유롭게 개선하는 측면의 도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욕심을 앞세워 무리한 일들을 벌리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에 어울리는 일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늙어갈수록 욕심은 내려놓고 사랑은 가슴에 담아야 한다.

그동안 마음에 안 들고 좋지 않은 감정이 쌓인 사람일지라도 흔쾌히 용서하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다.

공연히 내 입장과 같지 않다고 흠집을 잡고 나쁜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좋게 보면 한없이 좋게만 보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나이가 들면 예전에는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점차 힘겨워 하지 못하는 일이 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으로 나를 멍들게 하지 말고, 사랑의 눈으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을 소중히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인생의 짐을 짐이라 여기지 말아야 한다.

짐이라 생각하면 가벼운 것들도 무겁게 느껴지는 법이다.

누구를 위해 산다든가, 책임이니 의무니 하면서 스스로 구속하지 말아야 한다.

뭐 하다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해서 당장 잘못되는 것도 아니다.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느긋하게 해도 내가 할 일이라면 하기 마련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짐조차 행복하니까 말이다.


Canon EOS 5D Mark III | 1/200sec | F/1.4 | 0.00 EV | 50.0mm | ISO-800 | Flash fired, compulsory flash mode | 2014:06:02 13:08:49



지나친 간섭은 사람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아무리 격의 없이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충고나 간섭은 정도가 있어야 한다.

수 많은 사람과 뒤엉켜 경쟁과 타협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즘과 같은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예전에는 사랑이나 우정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녔지만, 요즘은 그보다 돈이 더 가치 있는 세상이다.

다만 그렇게 여기고 싶지 않은 것은 스스로의 마음일 뿐, 급박한 현실이란 벽에 부딪치면 선택은 역시 돈이다.

그래서 마음의 정이 아무리 두터워도 결국 돈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지게 되어 있다.

이러한 간섭은 잘 되라고 하는 간섭도 있지만 대부분 이해관계에 의해 생기는 경우가 많다.

결국 간섭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편안하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친하고 아끼는 사람일지라도 정도에 넘는 지나친 간섭은 오히려 사람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내가 양육하는 자식들도 부모의 잘되라고 하는 잔소리마저 간섭이라 여기는데, 하물며 성인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옛말에 <정승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다.>란 말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요즘처럼 자기중심적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무리 부모이고 친구라 해도 스스로 생각했을 때 “아니다.” 싶으면 아닌 것이다.

싫은데도 자꾸 강요하면 일부러라도 피하게 된다.

서로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고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윗사람의 위치에 있다고 해서 양해를 구하지 않는 일방적인 주장이나 명령은 옳지 않다.

요즘은 각자마다 개성이 강하다보니 남에게 피해나 상처를 주고도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억울함을 호소하면 오히려 <그만한 일로 왜 그러느냐.>고 역습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마치 못나고 힘없어서 당했으니 모두가 네 탓이라 듯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힘이 없고 능력이 모자라도 무시할 수는 있다. 

간섭을 하거나 말거나, 잔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두 번 다시 들어 주지 않고 안 만나면 그만이다

간섭을 하는 사람은 독불장군적 기질을 갖고 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잘해도 무조건 마음에 들지 않고, 자신의 지시나 감독 하에 해야 마음에 들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언제나 바쁘다.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여, 이 사람에게도 가 봐야 되고 저 사람에게도 가 봐야 한다.

그래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에는 공연히 트집을 잡거나 험담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칭찬받기를 즐겨한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도 하기 싫다.

그리고 내가 듣기 싫은 말 또한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간섭이나 잔소리 혹은 충고의 말은 상대방이 인지할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적당하다.

내게 주어진 일을 내가 아무리 완벽하게 했다손 치더라도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모자란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지나친 간섭은 도리어 사람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어 자신 역시 외롭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Canon EOS 5D Mark III | 1/200sec | F/1.8 | 0.00 EV | 50.0mm | ISO-800 | Flash fired, compulsory flash mode | 2014:06:02 13:09:32레이싱모델 한지은



성공의 큰 적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대상과 마주 섰을 때다.

하지만 이미 경험한 시간이나 일들이 과거가 되었듯, 성공은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자신이 원하는 것들로 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공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스스로 담대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은 스스로 바라는 만큼 볼 수 있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바로 마음에 의지를 담아 행동으로 옮겨야 비로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함이다.

마음속으로 두려움을 품은 채 세상을 바라봐서는 결코 제대로 세상을 볼 수 없다.

즉, 두려움이란 장막을 가린 눈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음이다.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 역시 경험을 바탕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장막 속에서 어찌 세상의 미추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직 자신에게 닥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관(觀)이라 한다.

그림은 그것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어떤 눈으로,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려한 그림도 마음을 담지 않으면 그저 평범한 그림이 되듯이, 어쩌면 그림은 화가의 마음에 색깔을 입힌 것이 아닐까?

이처럼 살면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야 하는데 두려움에 쌓여 정작 봐야할 것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원하는 것들을 얻었으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면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큰 지혜는 평범함 속에 있고 오히려 어리석게 보이는 것처럼 성공의 열쇠 역시 내 안에 있음이다.

나의 시간이 필요하고, 나의 노력이 필요하고, 나의 의지가 따라야 한다.

경험하지 않고 모르는 것이라면, 지금부터 시작하면 될 일이지 지레짐작으로 먼저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는 일은 이미 어느 정도 마음속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에 굳이 성공을 연연할 필요도 없다.

무엇인가 뚜렷한 성과를 올리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욕심이지 결코 진정한 행복은 아닐 것이다.

세파(世波)는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닐 게다.

일에 대한 실패나 좌절과 같은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에게만 어려움이 찾아오는 것처럼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결국 세월의 힘은 이길 수 없듯이, 좋은 경험으로 남든 상처로 남든 그 시기가 지나면 그만이다.

결국 어려움이 없으면 성장도 없고, 성장이 없으면 행복도 없기에, 세파에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장이나 거리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면 알 것이다.

이마에 진 주름 하나하나마다 세월이 묻어나고 거치러진 손 마디마디마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지 않는가?

신제품의 사용법을 모르고 신세대의 말이나 문화는 몰라도 삶에 대한 지혜만큼은 넘쳐나도록 그득할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배운 것 하나 없는 일자무식이라도 사는 문제라면 어떤 것이든 거침이 없다.

자신들의 지나온 삶이 바로 삶의 질은 다를지언정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성공이란 어떤 목표에 대한 결과나 사랑이나 욕망과 같은 감정의 충족일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돈이 만능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공허함이나 두려움 역시 그만큼 클 것이다.

흔히 운명이니 숙명이란 말이 있지만, 사람의 의지나 노력은 그 마저 바꿀 힘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성공 역시 굳건한 마음으로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성공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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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이나 원망은 짧을수록 좋다



가능하다면 세상에 대한 원망은 그냥 그대로 가슴 한쪽에 묻어놓는 것이 좋다.

원망이란 결국 다른 대상을 미워하는 마음이기에 우연일지라도 끄집어내지 말아야 한다.

원망하는 마음이 커지면 상대방이 아무리 진심으로 대해도 왠지 그 진심마저 꾸민 것처럼 진실 되게 보지 못하게 된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잘못된 인식이나 시각을 갖고 보게 되는 것이다.

제정신으로도 요즘처럼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데, 잘못된 인식이나 시각은 스스로 걸어가야 할 길을 어렵게 하기 쉽다.

미움이나 원망은 짧을수록 좋다.

미움이나 원망을 가슴에 담고 살면 살수록 힘들어지는 건 결국 자신뿐이다.

내가 잘못된 생각으로 다른 길을 걸어간다고 해서 누가 말릴 사람도 없을뿐더러, 다시 돌아오는 길 역시 멀고도 험하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원망보다는 이해를, 미움보다는 사랑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더 현명하다.

세상의 일 중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저절로 그 답이 보이기 마련이다.

흔히 문제가 생기면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남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잘못의 원인은 거의 대부분 자신에게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문제가 없는지, 먼저 체크하고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후에 그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으면 원망이나 미움이 더 자라기전에 당사자를 만나 해결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 노력 하나 없이 남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싫은 것이다.

하지만 웃기게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더 만나게 되고 신세를 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만나 어려움을 나누는 과정을 통해 서로 친해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기는 것만 못하듯, 원망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질수록 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이다.

이처럼 원망은 미워하는 마음보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

따라서 <미움도 정이다.>라는 말에서 보듯이, 원망도 계기가 생기면 오히려 더 친한 사이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원망은 대부분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못 가지는 것에 대한 반항심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즉, 자신은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 하나 없으면서, 일방적으로 들어주기를 요구하는 마음이라 할 것이다.

어린시절이야 철모르고 했다손 치더라도 나이가 들어서까지 그러면 곤란하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정이라는 것은 주고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를 원망하기에 앞서 항상 그 사람이 나에게 준 도움을 고마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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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될 때, 그것을 우연(偶然)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같은 우연이 두 번 중첩되면, 그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라 필연(必然)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우연(偶然)이 세 번 이상 겹치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운명(運命)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운명이란 결코 피해 가거나 지나칠 수 없는 일반통행과 같으며, 언젠가 반드시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은 피하기보다는 타 넘어가야 하야하는 일이다.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을 우리는 사회라 부른다.

운명이라는 것도 결국 <사회>라는 삶의 터전에, <나>란 존재가 속했을 때 내가 겪어야 될 상황들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 간의 수많은 이해관계의 소통이나 타협.

그리고 나에 속한 가족 또는 친구라는 영역을 지키기 위한 자리 다툼인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주어진 삶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내가 그 속에 속해있기에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 역시도 나와는 동떨어진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바로 나와 결부된 그 무엇인가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운명은 대부분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몫인 경우가 많다.

운명을 거슬릴 힘도 없고, 돈도 없고, 그렇다고 튼튼한 연줄도 없기에, 마음은 있어도 그 장애를 뛰어 넘을만큼의 힘이 없다.

하루하루 부지런히 손금이 닳도록 열심히 일하면, 무엇인가 그 운명을 극복할 성과가 있어야 하는데, 고작 제자리를 지킬 수 있음도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다.

물론 이처럼 운명을 뛰어넘는다 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늘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운명이라 믿는 만큼, 현실보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갈구하는 것이다.

운명은 늘 대가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운명은 성공보다는 좌절 뒤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열정이 살아있는 젊었을 때는 누구나 운명에 대해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 사회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차이를 인정할 때 쯤 운명도 함께 온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운명은 거스르기보다는 순응하는 것이 살아가는 대는 훨씬 더 편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란 정해진 세상보다 항상 다른 새로운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운명이라 믿는 순간부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그렇게 운명이란 놈은 잡으려고 발버둥칠수록 저 멀리 달아나버리지만, 절망이란 놈은 손만 내밀면 금방 다가온다.

따라서 운명을 이기는 상대는 <신념>밖에 없다.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만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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